길따라 소문따라/세계유산 조선왕릉 21

조선왕릉 양주 온릉 답사

조선왕과 왕후가 17 곳에 40기가 있다김포 장릉 답사를 마치고 내친김에 김포에서 약 35km 떨어진 양주 온릉 답사를 위해 김포대로를 달리다가 김포 IC에서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를 올라타서 송주 IC에서 빠져나와 장흥 방면으로 약 3km 달리다 보니 우측으로 온릉 지주간판이 나타났다. 주차장 입구가 협소하여 지나쳐 U턴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관람객이라곤 나 혼자 밖에 없어 조용하기보다 차라리 썰렁했다. 온릉 주차장(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세계유산, 국가사적, 안내도 온릉 출입구유공자 신분증을 제시하니 관계없이 언제나 무료라고 한다. 다른 왕릉은 입장료를 다 받는데 그렇다고 입장료 안 받는 이유까지 꼬치꼬치 물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보호 지역에 속해 비개..

조선왕릉 김포 장릉 답사

조선왕릉 답사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답사는 2016년부터 시작하여 2025년에 끝을 보게 되었으니 10년이 걸린 셈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는 우연에서 시작된다. 경기도 산을 오르내리면서 하산 길에 조선왕릉을 발견하고 우연히 들였다가 세계유산과 국가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조선왕릉 총 42기 중 이북 개성에 2기를 제외한 40기가 한양도성 100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등산할 때마다 틈틈이 답사를 했다. 장릉(章陵) 경기 김포시 장릉로 79에 위치 세계문화유산과 국가유산 사적 제202호로 등재되어 있다. 김포는 산이 없고 평야지대이다. 한북, 한남 정맥이 김포 끝자락에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바다로 스며들어 두 정맥은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구렁지 형태..

서울 상도동 양녕대군 지덕사 답사

같은 동네 모시고 사는 양녕대군서울 동작구 상도동 국사봉 북쪽자락 산기슭에 양녕대군의 묘소가 있다. 세월이 흘러 산이 택지로 변해 빌라와 아파트로 둘러싸여 하늘만 겨우 뚫린 형국이다. 거기다가 얼마 전까지 종친에서 사유물처럼 엄격하여 일반인들은 함부로 넘나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정문을 뚫고 들어갔다가 조경 전지작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 국사봉 지덕사 讓寧會館(종친회관) 지덕사 담장 담장 넘어로 지덕사 至德祀 표석 정문(외삼문) 讓名門(현판) 지덕사 부 묘소(至德祀 附 墓所) 조선시대 제3대 임금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이다. 사당은 1675년(숙종 1)에 세운 것으로 원래 숭례문 밖 도동에 있던 것을 1912년 이곳으로 ..

조선왕릉 서울 방배동 효령대군 청권사 답사

長壽가 閥族을 이어가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은 조선 1396년(태조 5)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보(補), 자(字)는 선숙(善叔), 호(號)는 연강(蓮江), 시호(諡號)는 정효공(靖孝公)이다. 효령대군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부터 9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아홉 분 임금의 조정을 보필하며 명예와 재물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왕실의 번영과 나라발전에 충성을 다하였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숭상한 은덕으로 91세까지 장수를 누리지 않았나 싶다. 1486년(성종 17) 사망하고 1737년 영조가 묘하에 사당을 세우고, 1789년 정조가 사당의 현판을 하사 1865년(고종 2년) 종묘(宗廟) 공신당(功臣堂)의 세종대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청권..

조선왕릉 영휘원과 숭인원 답사

얼굴도 모르는 할미와 손자가 나란히 묻힌 곳 영휘원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 씨의 원(무덤)이고 숭인원은 고종황제와 엄귀비 사이에 태어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첫아들 李晉 원손의 원이다. 두 원 청량리 천장산 자락 홍릉공원에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홍릉은 고종의 능호로 먼저 돌아가신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으나 고종 승하 후 지금의 남양주로 합장하였다.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90) 永徽園과 嵩仁園 (사적 제361호) ◇永徽園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1854~1911)의 원이다. 황귀비는 엄진상의 딸로 8세 때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조선왕릉 서울 의릉

하늘이 숨겨 놓은 산 아래 고이 잠들다 조선왕릉 총 42基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조선 초대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제릉과 2대 정종과 정인왕후 후릉을 제외한 40基 중 서울 의릉과 김포 장릉 2 곳만 남았다. 조선 왕릉을 답사하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다.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산행 전, 후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 주변에 있는 절과 명소를 찾으면서 조선 왕릉도 자연스럽게 게 되었다.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왕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비슷한 형식을 갖추었지만 왕릉이 있는 곳은 시대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왕릉 하나만 보면 됐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왕릉이 있는 곳은 수도 한양 100리 內 사방에 흩어져 있다. 왕의 무덤보다 입지가 더 답사의 관심사였다. 서울 의릉 (서울 성북구 화랑..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정릉

신덕왕후 정릉을 정동에서 정릉동으로 천장하다. 조선 왕릉도 답사도 이제 2基만 남았다. 총 42基 중 이북 개성에 있는 2基를 제외하고 40基가 한양도성 사대문 밖 100리 안 사방으로 17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15개 지역 38基는 몇 해에 걸쳐 답사를 마쳤고 인조의 부모 원종이 묻혀있는 김포 장릉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묻혀있는 성북구 석관동 의릉 만이 남게 되었다. 정릉입구에 버스정류장에 내려보니 우이신설 정릉역이 바로 가까이 있고 아리랑 고개, 그 유명한 미아리 고개는 대로로 변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정릉 도로표지판을 따라 아리랑골목시장을 지나 양쪽으로 빌라와 아파트가 늘어선 주택가를 빠져나오자 정릉 매표소가 나타났다. 북악산을 배산으로 하고 주택가에 둘러싸여 신성시되어야 할 유적지가 입구부터..

조선왕릉 여주 영릉과 녕릉 답사

조선왕릉 중에서 으뜸 명당이라는 영릉(英陵) ◈영릉(英陵) 英陵은 세종대왕의 陵號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조선 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군호는 충녕대군(忠寧大君)이다. 1408년(태종 8) 심온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결혼하여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둘째형인 효령대군(불가에 귀의)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바로 제위(1418~1450)에 올랐다. 32년 재임 기간 중 조선왕조 최대의 치적을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집현전 설치, 의정부서사제 도입, 국가오례 제정, 천문과학 기구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450년(세종 32) 5..

조선왕릉 남양주 홍,유릉 답사

고종 오백년 조선의 마침표를 찍다. 망국의 군주가 국호를 바꾼다고 개명군주 되나 고종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지만 어떠하던 고종 때 나라가 망하고 일제 강점기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신하를 탓하고 백성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국왕은 민비이고 민비의 손바닥에 놀아난 왕이라는 평가는 씻을 수 없다. 홍, 유릉 매표소 남양주는 아름다운 산과 숲, 그리고 물의 도시이다. 우리 명산 100 천마산, 축령산을 비롯해 국립수목원이 있는 광릉 숲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한강이라는 대미를 장식하며 남녘을 휘감고 흐른다. 그 중심에 조선왕릉 광릉, 사릉, 홍릉과 유릉이 자리 잡고 있다.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류릉 삼문이다 사릉에서 약 2km 떨어진 거리 차로 5분도 채..

조선왕릉 남양주 사릉 답사

단종의 몫까지 오래 산 여인 수목원과 광릉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광릉을 나올 때쯤 점심 시각이 훌쩍 지났다. 들어올 때 봐 둔 봉선사 주변 한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배를 채우고 20 여 km 떨어진 사릉에 도착하여 진입로를 찾지 못해 U턴을 거듭 한 끝에 간신히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하루 종일 비가 올 것 같은 날씨 속에 용케 피해오다가 드디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슬픈 여인의 삶과 잘 어우러진다. . 주차장 정문 주소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이다. 소나무 숲이 정문을 뒤덮었다. 소나무에 압도되어 한동안 하 늘울 올려다봤다. 수령이 얼마나 될까? 숲이 되려며는 한 200년 자랐을까? 잘 자랐고 튼실했다. 우거진 소나무 숲 사릉은 문화재청에서 왕궁과 왕릉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