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소문따라/세계유산 조선왕릉 17

조선왕릉 영휘원과 숭인원 답사

얼굴도 모르는 할미와 손자가 나란히 묻힌 곳 영휘원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 씨의 원(무덤)이고 숭인원은 고종황제와 엄귀비 사이에 태어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첫아들 李晉 원손의 원이다. 두 원 청량리 천장산 자락 홍릉공원에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홍릉은 고종의 능호로 먼저 돌아가신 명성황후의 능이 있었으나 고종 승하 후 지금의 남양주로 합장하였다.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동대문구 홍릉로 90) 永徽園과 嵩仁園 (사적 제361호) ◇永徽園 영휘원은 대한제국 1대 고종황제의 후궁이자 의민황태자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1854~1911)의 원이다. 황귀비는 엄진상의 딸로 8세 때 궁녀로 입궁하여 명성황후를 모시는 상궁이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조선왕릉 서울 의릉

하늘이 숨겨 놓은 산 아래 고이 잠들다 조선왕릉 총 42基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조선 초대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제릉과 2대 정종과 정인왕후 후릉을 제외한 40基 중 서울 의릉과 김포 장릉 2 곳만 남았다. 조선 왕릉을 답사하게 된 계기는 특별하지 않다.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산행 전, 후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 주변에 있는 절과 명소를 찾으면서 조선 왕릉도 자연스럽게 게 되었다. 어느덧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왕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비슷한 형식을 갖추었지만 왕릉이 있는 곳은 시대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왕릉 하나만 보면 됐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왕릉이 있는 곳은 수도 한양 100리 內 사방에 흩어져 있다. 왕의 무덤보다 입지가 더 답사의 관심사였다. 서울 의릉 (서울 성북구 화랑..

세계유산 조선왕릉 서울정릉

신덕왕후 정릉을 정동에서 정릉동으로 천장하다. 조선 왕릉도 답사도 이제 2基만 남았다. 총 42基 중 이북 개성에 있는 2基를 제외하고 40基가 한양도성 사대문 밖 100리 안 사방으로 17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15개 지역 38基는 몇 해에 걸쳐 답사를 마쳤고 인조의 부모 원종이 묻혀있는 김포 장릉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묻혀있는 성북구 석관동 의릉 만이 남게 되었다. 정릉입구에 버스정류장에 내려보니 우이신설 정릉역이 바로 가까이 있고 아리랑 고개, 그 유명한 미아리 고개는 대로로 변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정릉 도로표지판을 따라 아리랑골목시장을 지나 양쪽으로 빌라와 아파트가 늘어선 주택가를 빠져나오자 정릉 매표소가 나타났다. 북악산을 배산으로 하고 주택가에 둘러싸여 신성시되어야 할 유적지가 입구부터..

조선왕릉 여주 영릉과 녕릉 답사

조선왕릉 중에서 으뜸 명당이라는 영릉(英陵) ◈영릉(英陵) 英陵은 세종대왕의 陵號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조선 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군호는 충녕대군(忠寧大君)이다. 1408년(태종 8) 심온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결혼하여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둘째형인 효령대군(불가에 귀의)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바로 제위(1418~1450)에 올랐다. 32년 재임 기간 중 조선왕조 최대의 치적을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집현전 설치, 의정부서사제 도입, 국가오례 제정, 천문과학 기구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450년(세종 32) 5..

조선왕릉 남양주 홍,유릉 답사

고종 오백년 조선의 마침표를 찍다. 망국의 군주가 국호를 바꾼다고 개명군주 되나 고종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지만 어떠하던 고종 때 나라가 망하고 일제 강점기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신하를 탓하고 백성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국왕은 민비이고 민비의 손바닥에 놀아난 왕이라는 평가는 씻을 수 없다. 홍, 유릉 매표소 남양주는 아름다운 산과 숲, 그리고 물의 도시이다. 우리 명산 100 천마산, 축령산을 비롯해 국립수목원이 있는 광릉 숲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한강이라는 대미를 장식하며 남녘을 휘감고 흐른다. 그 중심에 조선왕릉 광릉, 사릉, 홍릉과 유릉이 자리 잡고 있다.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류릉 삼문이다 사릉에서 약 2km 떨어진 거리 차로 5분도 채..

조선왕릉 남양주 사릉 답사

단종의 몫까지 오래 산 여인 수목원과 광릉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광릉을 나올 때쯤 점심 시각이 훌쩍 지났다. 들어올 때 봐 둔 봉선사 주변 한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배를 채우고 20 여 km 떨어진 사릉에 도착하여 진입로를 찾지 못해 U턴을 거듭 한 끝에 간신히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하루 종일 비가 올 것 같은 날씨 속에 용케 피해오다가 드디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슬픈 여인의 삶과 잘 어우러진다. . 주차장 정문 주소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이다. 소나무 숲이 정문을 뒤덮었다. 소나무에 압도되어 한동안 하 늘울 올려다봤다. 수령이 얼마나 될까? 숲이 되려며는 한 200년 자랐을까? 잘 자랐고 튼실했다. 우거진 소나무 숲 사릉은 문화재청에서 왕궁과 왕릉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

조선왕릉 남양주 광릉 답사

쿠테타로 왕권을 찬탈하다. 광릉은 세계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보존지역 '광릉숲'의 일원이다. 광릉 숲은 조선조 제7대 세조와 정부인 정희왕후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조선 550년 동안 왕실림으로 보존되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광릉과 분리되어 임야로 편입되면서 오늘날의 숲이 된 것이다. 정문 매표소 세조(世祖 1417~1468)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책봉되었다. 대군시절에 세종이 세자 섭정을 실시하며 대군들도 정사에 참여시킨 것이 권력을 탐한 원인이라고 한다.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을 둘러싼 종친(안평대군)과 외부세력의 결탁으로 권력 찬탈이 일어나자 왕권 을 지키기 위한 난(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단종의 양위를 받아내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릉 파주 삼릉 답사

한명회 두 딸이 왕후가 되어 한곳에 묻히다. 한명회는 가난한 집안 칠삭둥이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증조부 한상덕의 보살핌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으나 수차례 과거에 낙방하고 음서(陰敍)로 개경 경덕궁 궁지기로 관직에 입문한 다. 수양대군과 인연이 닿아 계유정난의 주역이 되며 정난공신으로 조선왕조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재상 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실록에 2,300차례나 거명된 인물이다. 그의 두 딸이 왕후가 되어 같은 장소에 나란히 묻 혔다. 파주 삼릉 주차장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구 지번으로 봉일천리 3-134이다. 주차장이 아스팔트 대신 마사토로 깔렸다. 예산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알겠다. 파주 삼릉 정문 조선왕릉에는 세..

파주 조선왕릉 장릉

부부가 합장을 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명지대 교수 한명기가 쓴 '병자호란'을 읽었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후 반정공신들에 얹혀 내적으로는 감성을 바탕으로 국민을 호도 하고 대외적으로는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 친명배금(청)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드렸다. 병자호란은 사전에 방지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조는 절명의 기회를 놓치고 끝까지 망해가는 명을 상국으로 섬기다가 제 대로 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청의 철기병 말굽과 칼날에 수많은 양민과 군사가 전사, 도륙당하며 50만에 가까 운 백성들이 추운 겨울에 만주 심양으로 노예로 끓려 가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