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중에서 으뜸 명당이라는 영릉(英陵)
◈영릉(英陵)
英陵은 세종대왕의 陵號이다.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조선 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군호는 충녕대군(忠寧大君)이다. 1408년(태종 8) 심온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결혼하여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세종은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둘째형인 효령대군(불가에 귀의)을 제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바로 제위(1418~1450)에 올랐다.
32년 재임 기간 중 조선왕조 최대의 치적을 남겼다. 훈민정음 창제,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집현전 설치, 의정부서사제 도입, 국가오례 제정, 천문과학 기구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450년(세종 32) 54世의 나이로 죽었다.
영릉 종합안내도
여주 여강길 4코스 종점이 하이라이트이다. 영릉은 야트막한 산과 남한강의 선상지 사이 넓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천하 명당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나에겐 토를 달 능력이 없다. 강 크기에 비해 산이 좀 높았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매표소 및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코로나 19로 매표소 외엔 폐관이다. 조선왕릉 최고의 왕릉답게 건물 또한 이보다 훌륭한 건물은 없을 거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영릉
탐방로 전체가 마사토를 깔았다. 탐방로 주변 산자락엔 오래된 소나무가 자라고 광장에는 최근에 세로 단장하며 심은 듯한 나무들이 내일을 기약하고 있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갈림길
英陵(좌)과 寧陵(우)의 갈림길이다. 축구장보다 더 넓은 광장 중앙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고 주변에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고 조경을 했다. 나무 그늘 덕을 보려면 세월이 한참 지나야겠다. 윗대부터 먼저 참배하기로 한다.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 과학 발명품 야외전시장(1)
세종대왕 과학 발명품 야외전시장(2)
재실(신축)
작은책방(舊재실)
금천
연지
금천과 금천교
홍살문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門
참도
제향 때 왼쪽길은 향과 축문이 들어가는 향로(香路)이고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들어가는 어로(御路)이다.
수라간
제향때 사용할 음식을 따뜻하게 데우는 장소
수복방
능을 지키는 관리인이 임시로 머무는 건물
정자각(丁字閣)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丁' 字처럼 지어졌다고 붙인 이름이다.
정자각 계단
중앙이 향과 축문이 올라가는 신계(神階)이고 좌측이 임금이 올라가는 어계(御階)이며 우측이 제주(祭主)들이 이용하는 계단이다. 제주들의 계단이 없는 곳이 있는데 이는 나무로 만든 임시 계단을 이용한다.
비각
능 주인의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건물
神道碑
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沼憲王后 祔左
능침은 상계 중계 하계 삼계로 나눈다.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을 능상이라 하며 상계에 해당된다. 상계는 곡장을 치고 난간석으로 울타리 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석양과 능을 지키는 석호를 배치하고 망주석을 세우고 혼유석을 놓았다. 중계는 가운데 장명등을 좌우 문석인과 석마를, 하계는 좌우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했다. 12支神像을 새긴 병풍석은 세종때 국가5례에 의거 폐지되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동원이실 합장릉이다. 내부 회격 두 개소와 혼휴석 두 개가 특징이다.
정자각에서 내려다 본 참도
영릉은 소현왕후가 돌아가신 후 대모산(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에 모셨다. 세종의 능을 조성할 당시 지관들이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제의했으나 세종은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느냐 하며 반대했다. 결국 예종 1년(1469)에 현재의 영릉으로 이장했다. 한편 舊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1973년 발굴되어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겼다.
영릉 근무자 대기소
◈왕의 숲길
英陵(세종대왕)과 寧陵(효종대왕)을 오가는 왕의 숲길이다. 효종 이후 어떤 왕들이 선대를 참배하기 위해 이 숲길을 지나다녔을까 궁금해진다. 마사토가 곱게 깔린 0,7km 언덕길 사이로 키 큰 나무가 즐비하고 왕릉답게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 아래는 초화가 무성하고 간간이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참나무 등 이름을 아는 나무도 제법 있었다.
왕의 숲길 기점
'요산의 하루'
갈참나무
소나무
고개마루 쉼터
소나무 숲
신갈나무
꼬부라진 왕의 숲길을 빠져나가면 영릉이다.
◈영릉(寧陵)
寧陵은 효종대왕의 陵號이다.
효종대왕(孝宗大王 1619~1659)은 조선 17대 국왕으로 인조와 인열왕후(1618~1674) 사이 2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호(李淏), 자는 정연(靜淵), 군호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이다. 1630년(인조 8)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다.
1636년(인조 140 병자호란 발발 후 강화도로 피신했다가 청에 잡혀 삼전도로 끌려가 인조가 그곳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로 항복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 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다 1645년(인조 23)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급서 하자 급하게 귀국하여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649년(인조 27) 인조 사망하자 5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
10년 재임 기간 중 숭명배청(崇明排靑), 명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치욕을 씻는다는 복수설치(復讐雪恥), 북벌 계획을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1659년(효종 10) 41世의 나이로 죽었다.
연지
재실 전경
재실
현존하는 조선왕릉 재실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건물의 공간 배치가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실 내부
느티나무
500년 느티나무
300년 회양목(천년기념물 제459호)
300년 향나무
금천
홍살문
금천과 금천교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정자각 계단
비각
神道碑 朝鮮國 孝宗大王 寧陵
능침 전경
寧陵은 당초 동구릉(구리시) 건원릉 서쪽 능선에 조성되었다가 석물에 하자가 발생하여 1673년(현종 15) 여주로 이장을 했다.
동원상하릉
英陵으로 가는 왕의 숲길
소나무 숲
꼬리풀
물봉선
나가는 길
조선왕릉 42基 중 40基는 남한에 있고 2基는 북한 개성에 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조선왕릉 답사 길에 나선 지 어언 6년(2015~현재) 남한 37基는 답사를 마쳤고 서울 정릉, 김포 장릉, 양주 온릉 3基와 북한 개성 2基 제릉과 후릉 이 남았다. 북한 개성은 남북통일이 돼야 답사가 가능한 일이고 국내는 등산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다니다 보니 단박에 끝낼 일을 여태껏 끌고 왔다. 조선국의 왕릉이 시조부터 말기(27대)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은 위대한 국가의 반열에 오를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2021년 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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