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소문따라/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 남양주 홍,유릉 답사

안태수 2020. 9. 1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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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오백년  조선의 마침표를 찍다.

 

망국의 군주가 국호를 바꾼다고 개명군주 되나 고종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지만 어떠하던 고종 때 나라망하고 일제 강점기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신하를 탓하고 백성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조선의 국왕은 민비이고 민비의 손바닥에 놀아난 왕이라는 평가는 씻을 수 없다.      

 

홍, 유릉 매표소

남양주는 아름다운 산과 숲, 그리고 물의 도시이다. 우리 명산 100 천마산, 축령산을 비롯해 국립수목원이 있는 릉 숲과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한강이라는 대미를 장식하며 남녘을 휘감고 흐른다. 그 중심에 조선왕릉 광릉, 사릉, 홍릉과 유릉이 자리 잡고 있다.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홍,류릉 삼문이다 사릉에서 약 2km 떨어진 거리 차로 5분도 채 안 걸렸다. 남양주 제1청사 부근에 자리 잡아 심의 공원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왔다 갔다 했지만 맞아도 좋을 비 우산을 손에 든 채 속 맞고 다녔다. 

  

 

 

◈유릉

 

대한제국의 2대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1874~1926)와 첫 번째 부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민씨와 두 번째 황후 순정효향후(純貞孝皇后 1894~1966)윤씨의 동봉삼실합장릉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나 2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고종황제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 후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거행된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게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이 황위에 오른 것이다.

             

 

금천, 금천교, 재실

 

 

참배로

 

 

수복방

 

 

홍살문

 

 

침전 전경

향로와 어로 양 옆으로 조선왕릉에서 볼 수 없는 석물이 들어서고 정자각은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태조(주원장) 효릉의 방식을 따랐다며 대한제국 황제의 위용을 과시했다. 

 

 

석물상(마석 좌 우 4基, 낙타석, 해태석, 사자석, 상석, 기린석 각 좌 우 2基)

 

 

무인석

 

 

문인석

 

 

비각

 

 

純宗孝皇帝 裕陵 純明孝皇后 祔左 純貞孝皇后 祔左

 

 

침전

 

 

침전 앞 전경

 

 

능상

 

 

능침

 

 

 

◈홍릉

 

조선의 26대 마지막 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1852~1919)와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민비의 합장릉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순조의 손자 효명세자(익종)의 아들 헌종과는 8촌 間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출생은 아니었지만 임금이 되는 운명을 타고났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23세에 죽고 영조의 유일한 혈족인 철종이 준비되지 않은 채 왕위에 올랐으나 철종 역시 후사 없이 일직 죽자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적극 지원으로 고종이 임금에 오른 것이다. 

 

 

홍릉 가는 소나무 숲

 

 

연지

 

 

홍릉 입구

 

 

재실

 

 

홍살문

 

 

침전 전경

 

 

침전

 

 

침전 앞 전경

 

비각

 

 

大韓 高宗太皇帝 洪陵 明成太皇后 祔左

 

 

능상

 

 

 

◈영원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1897~1970)와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1901~1989) 이방자 여사 합장릉이다. 영친왕은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 7남으로 태어났다. 이복형인 순종 때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일본에 인질(막부시절 참근교대제)로 잡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본 황실가 여인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중장까지 지내다가 건강 악화로 1963 귀국하여 1970년 7년간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비운의 황태자라고 한다.

 

     

홍, 유릉 후문을 나와 따로 조성한 園을 향해 호젓한 자락길을 걷는다. 오가는 사람이 있어 나처럼 참배객인가 했더니 이웃 주민들의 산책로를 겸하고 있었다.

    

 

영원, 회인원, 덕혜옹주 묘, 의친왕 묘 가는 길

 

 

재실

 

 

홍살문

 

 

정자각

 

 

비각

 

 

大韓 懿愍皇太子 英園 懿愍皇太子妃 祔左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능침

 

 

능침 접근이 가능했다. 곡장 가까이서 보는 능침 공간 각종 석물들을 한눈에 엿볼 수 있었다.

 

 

 

◈회인원(懷仁園)

 

조선의 마지막 왕세손 이구(李玖 1934~2005)의 묘이다. 이구는 영친왕과 이방자 사이에 둘째 아들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53년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건축가로 활동, 1959년 미국 여자와 결혼 자녀는 없고 그 후 이혼, 1963년 귀국하여 낙선재에 기거하며 서울대가 연세대에 출강도 하며 사업차 일본도 오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도쿄 한 호텔에서 75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부모 곁에 묻혔다.

 

 

李玖 之墓

 

 

역대 조선왕릉 소개

 

 

덕혜옹주 일생 소개

 

 

大韓 德惠翁主 之墓

덕혜옹주(1912~1989)는 고종과 후궁인 귀인 양씨 사이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경성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에 다으며 1925년 일본 도쿄로 중등과정의 유학을 떠났다. 졸업 후 1931년 옛 쓰시마 번주의 양자천황의 칙허를 받아 결혼하였으나 실어증, 정신병, 출산, 장기입원(15년) 이혼의 절차를 거치며 1962년 38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 정부지원금으로 살다가 1989년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義親王 之墓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은 고종과 후궁 귀인 장씨 사이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공직을 잠시 맡다가 일본 미국을 유학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립운동가로 활약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후 국가로터 황족의 예유를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다가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홍, 유릉을 돌아 나오는 길은 500년 조선의 역사의 패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고종대한제국을 건국하여 당시 열강과 어깨를 겨누려고 발버둥 쳤지만 역부족으로 나라를 잃고 망군으로 주저 고 말았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등으로 책임을 돌리지만, 일본 막부도 역시 쇄국정책을 펴다가 메이지 유신을 불러드려 망국하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 순식간에 제국주의 반열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한마디로 조선은 인재가 없었다. 인재가 나타나지 않으면 같은 역사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작금에 인재도 아닌 게 설쳐되는 것을 보면 걱정이다.

    

 

 

 

 

                                                       2020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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