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祖 이성계가 잠든 동구릉을 가다
동구릉은 태, 강릉에서 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아차산 북쪽 끝자락 59만 여평에 자리 잡고 있다. 아차산은 수락지맥이 한북정맥 남양주 천보산에서 갈라져 나와 남진을 하며 수락, 불암을 낳고 아차산을 끝으로 잔여 가지는 한강과 도심으로 흘려 보냈다. 한양 도성에서 동쪽에 있는 9基의 능이라는 뜻이다. 태종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처음 모시고 이어 5대 문종이 묻히면서 400년에 걸쳐 9릉에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했다. 어찌 조선 제1의 명당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15:15) 동구릉 매표소
구리 동구릉(九里 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66) 내비게이션에 동구릉이라고 막연하게 지정하는 바람에 동네로 들어가 같은 코스를 여러 바퀴 돌고 난 후 동구릉 주차장으로 재 지정한 후 겨우 도착했다. 내비게이션 없으면 꼼짝 못 하고 낱말 하나까지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생고생한다.
동구릉 역사문화관
들어가는 입구
약 600년 동안 보호하고 가꾸어 온 숲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본 도치키현 닛코시에 도쿠가와 에이야스가 묻혀있는 동조궁에 가 본 적이 있다. 400년 넘은 삼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큰 기대로 하고 들어섰다.
재실 전경
재실(齋室)을 이 곳에 있는 9基의 능에 각각 따로 마련하지 않고 한 군데서 통괄하고 있다. 재실은 왕릉관리소이며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재실 앞 계류는 동구릉 전체를 아우르는 금천(金川)으로 산지의 임수 기능을 한다. 금천에 놓이면 금천교.
팥배나무
갈참나무
가을 단풍이 돋보여 갈(가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참나무 수명은 약 200년이 된다고 한다. 물론 그 이상 사는 나무도 있지만 죽고 살기가 계속 반복된다. 산에 참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은 나무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수릉(綏陵)
추종 문조(文祖 1809~1830년)와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년)의 능(합장릉)이다. 문조는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나 4세에 세자(효명세자)에 책봉되고 19세부터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22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에 추존되자 대비가 되어 83세에 사망하기까지 4대(순조, 헌종, 철종, 고종)에 걸친 왕실의 권력에 관여한 여장부로 기록된다.
동구릉은 아차산 동쪽 기슭에 부채꼴처럼 펼쳐있다. 건원릉을 중심으로 右로 5基, 9位와 左로 3基, 7位가 모셔져 있다. 재실에서 가까운 곳부터 답사를 하다 보니 代를 무시하고 수릉부터 먼저 답사하게 되었다. 단체 관람객과 마주쳐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써도 꼬리가 얼마나 긴 지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홍살문
붉은 기둥을 세워 만들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비각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神道碑)이나 표석을 세워둔 건물.
정자각과 능침
능침 접근이 불가능하여 최대한 잘 보이는 곳에서 전망하다.
◈현릉(顯陵)
조선 제5대 문종(文宗 1414~1452년)과 현덕왕후(賢德王后 1418~1441년)의 능(동원이강릉)이다. 문종은 8세에 세자가 되어 29년간 실무를 익혔고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단종)를 남긴 비운의 왕이었고 현덕왕후는 세 번째 세자빈으로책봉되어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는다.
현릉은 참도가 두 번 꺾여서 정자각에 닿는다. 높은 쪽이 향로(香路)이고 낮은이 어로(御路)이다.
현릉 전경
정자각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같은 능원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형식이다.
◈건원릉(健元陵)
조선을 건국한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1335~1408년)의 능(단릉)
금천교
홍살문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보물 제1741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의 현릉의 양식을 기본적으로 따랐으며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표준이 되다.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 목계(左), 신계(中). 어계(右), 향과 축문이 올라가는 계단과 임금이 올라가는 계단을 구분하고 祭主들은 별도의 나무로 만든 임시 계단을 사용하다.
비각과 능침
비각
신도비(神道碑)
표석(表石)
목릉 가는 길
건원릉 우측 모룽이를 돌아 진입로가 부실한 약간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진입로에는 서어나무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목릉(穆陵)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년)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1600년)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능(동원이강릉)이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궁 소생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생전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두 전쟁을 치렀다. 의인왕후는 선조의 정비,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원자(영창대군)를 생산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왕위 경쟁에서 광해군에게 밀려났다.
홍살문
참도
선조릉과 정자각
목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이다.
의인왕후릉 능침은 상계 중계 하계 삼계로 나눈다.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을 능상이라 하며 상계에 해당된다. 상계는 곡장을 치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12支神像을 새긴 병풍석을 두르고 난간석으로 울타리 친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석양과 능을 지키는 석호를 배치하고 망주석을 세우고 혼유석을 놓았다. 중계는 가운데 장명등을 좌우 문석인과 석마를, 하계는 좌우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했다.
목릉의 신도는 지형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었다.
인목왕후릉
◈휘릉(徽陵)
조선 제16대 인조(仁祖)의 두 번째 부인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년)의 능(단릉)으로 후사가 없었다.
금천교
홍살문
휘릉의 정자각은 양 옆에 익랑(翼廊)이 붙어 있다
능침
참도
원릉 가는 길
◈원릉(元陵)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년)와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년)의 능(쌍릉)이다.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나 경종의 代를 이어 조선 임금 중 가장 오래 살고(83세) 오래 재위(52년)한 임금이다. 아들(사도세자)을 7일 동안 뒤주에 가두고 굶겨 죽여 비정한 아버지의 표상이 되었다. 정순왕후는15세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였다.
홍살문
참도를 양 옆으로 넓혔다.
원릉의 비각에는 세 기의 비석이 있으며 비각도 다른 능에 비해 크다. 두 기는 정조와 고종의 친필이 새겨진 비이고 한 기는 정순왕후의 비이다.
경릉 가는 길
어느듯 해가 서산에 걸려 왕릉을 바라보는 시각이 역광으로 변했다. 풍경도 흐릿해지고 사진빨도 받지않아 흥이 많이 깨졌다.
◈경릉(景陵)
조선 제24대 헌종(憲宗 1827~1849년)과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1843년) 두 번째 왕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1903년)의 능(삼연릉)이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추존 익종)와 신정왕후 사이에 태어나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할머니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어 효현왕후 김씨를 왕비로 맞아드렸다. 헌종 9년에 효현왕후가 죽자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이했다, 결국 헌종은 후사를 잇지 못하고 23세의 나이로 죽었다.
홍살문
참도
경릉의 능침은 하나의 곡장 안에 세 기의 봉분이 안장된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이다.
비각
혜릉 가는 길
능과 능 사이는 약 10 여분 거리, 잠시 생각을 정리를 하다보면 금새 닿는다.
◈혜릉(惠陵)
조선 제20대 경종의 첫 번제 왕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년)의 능(단릉)이다. 단의왕후는 세자빈으로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후로추존되었다.
홍살문
참도
능침
숭릉 가는 길에 좌측에 연못도 있고 쉼터도 조성되어 있다. 현재 공사 중으로 출입을 막고 있어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숭릉(崇陵)
조선 제18대 현종(顯宗 1641~1674년)과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년)의 능(쌍릉)이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 있을 때 심양에서 태어나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인조의 왕세손, 이어 효종의 왕세자로 책봉되어 효종이 죽자 왕위에 오른다. 명성왕후는 숙종을 낳았다.
홍살문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이다.(보수 공사 중)
◈나가는 길
산책로
안내도
왕의 숲
병아리꽃나무
(17:40) 동구릉 주차장답사 전에 공부하여 관전 포인트를 알고 가지 않으면 다 그게 그것처럼 보인다. 왕릉은 조선왕릉의 상설도에 준하여 조성하였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과 능 주인의 권세에 따라 그 형태를 조금씩 달리할 뿐 전체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동구릉 같은 경우 대표적인 건원릉 하나만 정밀 답사하면 나머지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쉬운 것은 능침을 개방하지 않아 가까이서 볼수 없다는 점이다. 동구릉을 찾는 대부분 사람은 산책을 즐기고 숲의 맑은 공기에 더 심취하는 것 같았다.
201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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