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애환의 중심 영월
조선 왕릉은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조선이 망하고도 600년 동안 지켜온 장대한 조선 왕실의 장례 문화와 능
원 관리 제도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장릉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소, 단종은 조선 6대((1452~145
5, 3년 재위) 임금으로 즉위할 때 나이가 12세 어린 임금이었다. 아버지 문종 사후 정권은 어린 임금을 둘러싼 권
력 다툼의 현상으로 빠져 어린 임금으로서는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을 동서고금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는가? 세조가 정변의 주역으로 나선 것도 왕조 정권이 신료들의 권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왕실이 나선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정변 때 의례히 나타나는 모사, 회유, 반역, 살상,
등이 자행되면서 단종은 최후의 희생자로 남는다.
◇ 장릉
장릉 관광안내소와 주차장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87)
우리나라 관광지 어딜 가나 평일은 한산하다. 따라 주변 기념품 가계, 식당은 손님이 없다. 며칠 전에 통화한 장릉
해설사를 만났다. 방문 일자와 도착 시각을 통보해주면 준비를 해두겠다고 한다. 장릉에서 점심 먹을 장소도 알아
봤다. 장릉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장릉식당' 1인분 김치찌개를 주문하고 주인장(女)과 단체주문을 상담했다.
일없어 보인다. 산채비빔밥에 들어가는 나물은 영월지방에서 나는 것들로 자기가 직접 조리를 한다고 한다. 거창
에서강원도 영월로 시집와 장릉 앞 지금의 자리에 기사식당부터 시작해서 반듯한 건물을 소유하게 된 되까지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반찬으로 나온 것들이 하나같이 입맛에 맞는다.
장릉은 몇 차례 다녀봐서 특별할 게 없다. 사진도 2011년에 촬영한 것을 옮겨다 쓰고 빠진 부분만 몇 장 찍어 왔
다. 장릉은 단종과의 이해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능을 조성하다 보니 장소 선택부터 지극히 형식적으로 진행된
것 같다. 제향 공간이 협소하고 능침이 가파른 구릉지에 올라앉고 참도는 'ㄱ'자로 꺾여졌다. 내가 본 왕릉 중에는
제일 작은 규모다.
장릉 제향공간
홍살문, 참도, 수복실, 비각, 정자각
정자각(2011년 촬영)
단종 능침 가는 길
정자각에서 바로 능침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고 능 입구에서 계단을 이용해 언덕을 올라야 한다. 능을 참배하는 동
선이 엉켜버린다.
참배로
단종 능침
능침에서 내려다 본 제향공간
참배객 휴식공간
영천(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우물)
엄흥도 장려각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족을 멸한다는 조정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월호장 엄홍도는 서강에 버려
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 엄씨 선산에 암장한다.
낙촌 박충원 비각
단종 사후 1516년(중종11) 영월부사였던 낙촌 박충원이 꿈속에서 노산군(단종)의 시신이 묻힌 암장을 찾아
봉분을 갖추었다가 1580년(선조 13) 표석, 상석, 장명등, 망주석을 등을 세워 능역 조성, 1698년(숙종 24)에
단종으로 복위하고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 한다.
재실, 단종역사관
장판옥은 단종과 죽음을 같이 한 충신, 조사, 환관, 궁녀 등 268명의 위폐를 합동으로 모신 곳이다.
◇청령포
청령포 매표소 (영월군 영월읍 청령포로 133) 건물은 단종의 애환이 서린 청령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다.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으로 복원하여 청령포의 애잔한 모습을 살려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주차장과 건물
을 산모퉁이에 돌려세우고 사람들은 더 걷게 하고 청령포 주변을 더 푸르르게 조성하고 강에는 거룻배를 띄운다
면 얼마나 운치가 있을까 상상해 본다.
1457년 6월 22일 단종의 유배행렬은 창덕궁을 출발하여 지금의 청계천 7가, 8가 사이에 있는 영도교에서 정순
왕후와 마지막 작별을 하고 광나루로 향한다.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에서 내려 육로로 원주 부론,
신림, 영월로 들어가 주천을 거쳐 7일간의 여정 끝에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한다. 종착지 청령포에는 금표비가
세워졌다. 단종의 거취를 제한하는 내용이다. 금표비에는 동서 300척(90m), 남북 490척(150m) 진흙이 쌓여 생
기는 곳도 금한다고 하니 땅은 밟지 말라는 것이다.
청령포 안내판
청령포 수림지(천년의 숲)
단종 어소
단종 어소
단종 어소
단종 어소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碑
영조의 명에 따라 영조의 친필로 음각된 비석을 세우다. (단종이 계시던 곳이다)
궁녀와 환관노의 처소
영월 천년기념물 관음송 (천년기념물 제349호)
수령 600년,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 올 당시 소나무의 수령은 60년 정도.
망향탑 안내문에는 단종이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쌓은 탑이라고 합니다.
서강
단종은 순흥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어 세조에 의해 사사賜死명령이 내
려진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로 출발할 때 홍수로 인해 서강의 물이 범람해 청령포가 잠겨 거처를
영월의 객사로 옮겨 머물던 중 관풍헌 앞 마당에서 賜死되어 서강에 던져진다. 실록에는 자살, 야사에는 단종을
모시고 있던 통인의 활시위로, 역사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달리 기술된다.
노산대 안내문에는 단종이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이라고 합니다.
청령포는 서강이 3면을 휘감고 흐르면서 나머지 한쪽 면은 육육봉에 기대고 있다. 물길이 돌아가는 곳이라 산허
리는 패이고 깎여 험준한 바위만 강으로 노출되어 있다.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천연의 위리안치 요새다.
육육봉에서 흘러내린 작은 산줄기가 서강에 내려 앉아 단종은 자주 이곳에 올랐다고 한다.
물가엔 모래 없는 흙과 자갈이 먼지를 폴폴 일으킨다. 나룻배는 동력선으로 바뀌고 강폭은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
로 좁아졌고 시멘트로 포장한 보도, 계단, 콘크리트 배수관이 청령포 쪽으로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
다. 강둑엔 뱃사공의 초가 대신 현대식 유리 건물이 들어서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흉물스러워 보인다. 배가
강가에 접한 할 때는 상륙작전하는 기분이었다.
2016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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