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융릉隆陵과 건릉健陵 답사
조선 500년 동안 성군을 뽑으라면 우리는 과연 몇 분이나 꼽을 수 있을까? 가까운 식구들한테 물어보니
3대 태종, 4대 세종, 22대 정조가 고작이다. 나머지 임금들은 어떤 역사를 만드셨는지 공부가 못 미쳐 좀
처럼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잊고 사는 듯하다. 한세대에 한 명의 성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해서 훌륭한 성군의 출현을 바라고 있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닌지 모르겠다. 21세
기 대한민국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출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 500년이 몇 분의 성군으로 버티어
왔듯이 작금의 우리 세대는 각자 현명한 삶의 지혜가 필요할 때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융릉 건릉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 187-1)
시간 나면 한번은 들려보려고 작정하고 있던 차 어느 봄 같은 겨울 차를 몰고 어부인과 집을 나섰다. 요즘
길 안내는 스마트 앱 지도와 내비게이션이 도맡고 있다. 서울 상도동에서 경기도 화성시 융, 건릉까지 40km
50분 거리 사당, 과천, 의왕, 수원, 화성 아파트가 줄지어선 길을 평일이라 막힘없이 단숨에 달려왔다.
과천을 벗어나면서 처음 타보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엮여 도로 표시판을 쫒을라 운전할라 정신 못 차린다.
나이 70 넘으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는 거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매표소
융 건릉은 약 842,662㎡(25평) 규모로 화산花山 자락에 있으며 꽃이 많다고 했다. 화산 높이가 100여
미터 정도면 산이라기보다 구릉지에 더 가깝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
산으로 옮기기 위해 얼마나 숙고를 했는지 지관地官조차도 알지 못했다는데 당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당사자들이 조정에 건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당시 화산에 거주하던 백성들
을 팔달산 화성 예정지로 이주시키면서 후하게 보상하여 백성들을 감탄케 했다고 한다.
유공자는 배우자까지 무료 관람 혜택을 받는다.
관광안내소
융 건릉은 화성 시가지 한복판에 있다.
능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 산 능선과 화성 시가지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능 정문을 들어서니 도심에 상당
한 녹지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능선 중앙에 두 능을 가르는 작은 능선이 있어 자연스럽게 융릉과 건
릉이 나뉘어 있다, 정문에서 출발한 탐방로는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돌며 능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걷
는 뜻 있는 재미를 제공하는데 산불예방으로 능선으로 오르는 산책로 출입을 막고 있어 오늘은 허탕이다.
마사토가 곱게 깔린 탐방로, 잘 다듬고 가꾼 소나무 숲, 바람 타고 코끝을 스치는 소나무 향기, 신들의 정
원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은 엄숙하기 보다 소슬하다.
융릉과 건릉 갈림길에서 우측 윗대 융릉을 먼저 참배하기로 한다.
넓은 평지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반반씩 자리잡고 있다, 여름에는 깊은 그늘을 제공하여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겠다.
금천교
금천교(元大皇橋)
곤신지坤申池
묘에서 남서방향으로 첫눈에 띄는 곳으로 물이 난다는 풍수설에 의거 연못을 조성하다.
곤신지
홍살문(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문)
참도參道(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은 길 신도神道가 어도御道 보다 높게 조성 됨)
비각
비문(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현경의황후 부좌) 광무 4년 제작
비문(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릉원) 정조때 제작
정자각丁字閣(정자 모양의 제향을 올리는 집)
제수진설도
융릉의 주인(사도세자, 장헌세자, 장조 1735~1762)
1762년(영조 38) 수은묘垂恩墓(사도세자) 당시 양주, 현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조성
1776년(정조 원년) 영우원 永祐園 (장원세자)으로 격상
1789년(정조 13) 영우원을 화산(현재의 화성)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침
1815년(순조 15) 헌경의황후(혜경궁 홍氏)와 합장으로 원을 조성
1899년(광무 3) 장헌세자 묘호를 장종莊宗, 능을 융릉隆陵 왕으로 추존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능稜(왕과 왕비), 원園(왕세자, 왕세자빈, 왕의 사친)과
그 외 왕족은 일반인과 같이 묘墓라 한다.
융릉 이정표
이 담장을 못 넘게 하여 능침 가까이는 갈 수가 없다. 먼 곳에서 참배하고 만다. 능을 나오면서 능 관리소
에 능침 개방은 언제 하느냐고 물었더니 미리 신청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융릉에서 건릉으로 넘어가는 오솔길에는 참나무 우거져 있고
건릉이 가까워 지면 소나무가 빽빽하다.
건릉 전경
홍살문
정자각
정자각
비각
비문(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
건릉健陵의 주인 22대 정조(1752~1800)
정조는 할아버지(영조)에 의해 아버지(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현장을 옆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도 했지만, 엄마도(혜경궁 홍씨) 외조부(노론의 영수)도 조정의 누구도 구명에
나서지 않고 죽임을 협조하거나 방임을 한다. 이때 정조의 나이 10살 세손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세손의 목숨도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다행히 영조
의 왕족 혈통 계승과 혜경궁 홍씨의 보호로 세손이 임금에 오를 수가 있었다.
동절기 산불 예방을 위하여 산책로 폐쇄(12월 15일~익년 5월 15일까지 5개월간)
융릉 건릉 역사 문화관
향나무(수령 140년)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왕과 아버지 원수들로 가득 찬 조정이 어쩌면 자기도 죽일 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에서 용하게 목숨을 부지하여 임금에 올랐다. 그 일성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
련된 조정 대신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피의 숙청으로 들린다. 그러나 오랜 세월 조정의 뿌리 깊은
세력은 임금도 단번에 개혁할 수가 없었다. 정조는 당장 모든 것을 처리하려는 조급함을 보이지 않고 아버
지의 복권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정책 그리고 새로운 인재 등용과 왕실 호의군 창설 등으로 조정 반대
파들의 국정 장악력을 떨어뜨리게 하며 서서히 퇴진의 길로 모는 정책을 만들어 간다. 아버지의 묘를 화산
으로 이장하고 수원 화성을 축성하여 어쩌면 천도할 작정까지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15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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