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대한제국 황실 덕수궁
산행 중 가끔 무릎이 아프면 완화될 때까지 평지를 걷는다. 무작정 길을 걸을 수는 없고 생각 끝에 역사문화 탐
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조선왕릉과 조선왕궁 탐방을 시작했다. 오 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니깐 평생 걸어도
못다 걷겠지 하는 즐거움이 기대된다.
덕수궁(德壽宮)
선조가 임진왜란을 피해 의주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세조의 장손 월산대군의 사가를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
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기존 궁궐들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사용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월산대군 후손들의
사가는 의경세자가 죽고 과부가 된 인수대비를 위해 세조가 마련해준 것이라고 한다. 광해군이 즉위 후 창덕궁
으로 옮기면서 경운궁(慶運宮) 궁호를 붙여주었고 그 후 빈 궁으로 남아 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식
을 거행한 계기로 황궁의 면모로 갖추었다. 일제의 민비 시해 때 아관파천(俄館播遷), 세자를 데리고 러시아 영
사관으로 피신했고 1904년 경운궁의 대화재로 전각이 대분분 소실이 되었다가 복구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갖
추게 되었다. 이때 大安門이 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시청 광장
시청 광장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동문이며 正門이다. 원래 정문은 중화문 앞 남쪽에 인하문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사라진 이유가 기록
에 남아있지 않아 억측이 난무하다. 궁궐의 門은 정전까지 三門 체계인데 삼문 체계를 완성하려면 인화문과 중
화문 사이에 문이 또 있어야 하는데 문을 세울만한 공간이 없다. 나름대로 추리해 보면 대안문을 정문으로 하고
인화문을 철거한 후 대한문과 중화문 사이 조원문을 세워 삼문체계를 완성한 게 아닌가 여겨진다. 조원문도 일
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철거됐다.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금천교(錦川橋)
풍수를 갖추기 위해 물길을 끌어다가 내(錦川)를 만들고 다리(錦川橋)를 놓았다.
大小人貟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 '여기를 지나는 모든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라'
마침 해설사를 동행한 관람팀을 만나 따라나섰다.
◇중화전 권역
중화문(中和門)은 덕수궁(경운궁)의 삼문이고 정전(중화전)의 정문이다. 중문은 조원문(朝元門)으로 복원 계
획 중이라 한다.
중화전은 덕수궁(德壽宮)의 정전이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이 경운궁(慶運宮)이고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거를
하면서 붙였다. 정전은 즉조당(即祚堂)이었는데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면서 즉조당 앞에 중화전을 새로 지
었다.
중화전(中和殿)
중화전
중화전 앞 뜰은 공식적인 조정회의나 국가적인 행사장으로 사용하며 어도와 문무백관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중화전의 장방형 행각 중 현재 남아 있는 행각
준명당(浚明堂)
내전(內殿)으로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장소이며 한때 침전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즉조당(即祚堂)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 임시 거처로 사용했으며 인조가 반정을 성공한 후 즉위하며 즉
조당이란 당호를 붙였다. 그 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부터 돌아와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준명당과 즉조당은 난간이 있는 복도로 연결되었다.
석어당(昔御堂)
선조 26년(1593년) 때 지은 이층 구조 건물이다. 선조가 승화하고 광해군이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를 유페시
키고 인조가 광해군을 문초한 곳이다.
◇석조전 권역
석조전 전경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석조 3층 건물이다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고 1900년 착공하고 1910년에 준공했다.
석조전 서양식 정원
석조전(石造殿) 동관(東館)
고종의 집무실과 대 내외 사절단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
용 되기도 했다.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 중이다.
석조전 서관(西館)
1937년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지어졌다. 이왕가미술관,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관광객
석조전 권역 전경
광명문 권역
광명문(光明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다.
함녕전 행각
덕홍전과 함녕전
덕홍전(德弘殿)
고종의 내, 외 귀빈의 접견실로 사용
함녕전(咸寧殿 보물 제820호))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 1919년 고종이 승하하신 곳, 조선 후기 마지막 왕실 침전 건물로 연구 자료가 된다고 함.
함녕전 어좌와 일월오봉도 병풍
함녕전 일원
현재 마당에 놓인 것들은 전시중인 작품들이다.
정관헌 전경
정관헌(靜觀軒)
정관헌
1900년도 경에 건립된 동, 서 건축양식이 혼합된 휴식 공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역대 왕의 어진(御眞)
을 봉안하기도 했다.
정관헌 뜰에서 본 중화전 후원
정관헌 뜰에서 본 함녕전 후원
산책로와 쉼터
연못
◇덕수궁 주변 문화재
회화나무
중명전(重明殿)
황실의 도서관 보물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1899년 미국인 다이의 설계로 단층 서양식 건믈로 지어졌으나 화재
로 재건하면서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지었다. 처음엔 수옥헌이었는데 1904년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증명전이 되었다. 이듬해 이곳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을사조약의 현장
1905년 11월 18일 고종을 대신하여 이토 특사가 대한제국 대신과 조약 체결에 관한 회의 주제 장면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대한제국의 대신 8명 중 2명은 조약 체결을 반대하고 6명은 조건부 찬성 혹은 묵시적 동의를
했다. 역사는 단순하게 고종은 반대하고 대신들이 찬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총체적으로
국가기능이 무너진 실패가 그 원인이다.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면 그와 같은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주역
외무대신 박제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
현,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밑줄 친 5명은 을사5적으로 몰렸다.
구러시아공사관 터에 남아 있는 탑
고종과 민비가 러시아에 보호령 요청을 한다. 이에 놀란 일본이 조선 주재 일본 공사가 일본군과 경찰, 낭인을
동원하여 민비를 제거하는 결단을 내린다. 혼비백산한 고종은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俄館播遷)한다.
정동 제일교회
서울성공회성당
덕수궁 일원 옛날 사진
어린 해설사를 누가 교육시켰는지 일본제국의 침략사를 악랄하게 비난한다. 반일 종족주의를 보는 것 같아 섬듯
했다. 70이 넘은 나도 일제를 겪어보지 못해 실상을 잘 모른다. 어디 가서 내 놓고 자신 있게 얘기할 정도로 역
사 지식도 갖추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역사교과서 범위가 전부이다. 이런 지식으로 일제강점기를 논한다
는 것은 상당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성인이 되어 깨닫게 되었다. 다양한 역사서를 읽고 판단해야 할 문
제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가 일본 오사카 미쓰비시 조선소의 노무자였다. 국내 집안은 소작인으로 피죽도 제
때 못 먹는 어려운 처지였어 아버지가 보내는 송금으로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했다. 어머니와 결혼 후 일본에서
3남 1녀를 낳아 위에 둘을 소학교까지 보내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 후 6,25 전쟁을 겪으며 부모님은 늘
일본의 생활을 그리워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욕해도 일본을 나무랄 수가 없는 이유다.
2019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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