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소문따라/세계유산 조선왕궁

조선왕궁 창경궁 답사

안태수 2023. 5. 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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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대구동인 초딩 동기들과 창경궁 봄 소풍

 

대구서 태어나고 서울서 공부하고 직장 얻어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아온 친구들, 지금은 은퇴하여 저세상을 바라보는 나이, 먼저 간 친구도 있고 병마와 시름하는 친구도 있고 아직 팔팔한 친구도 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차례가 없다고 한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바람처럼 휙 사라지는 게 성공한 삶이다.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 11시 30분 집합이다. 겉 보기엔 멀쩡해도 지병을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 다들 만보기에 수명을 걸고 걷기를 생활화하고 있지만 가끔은 지겨운 속내를 드낸다. 누군가 봄에 창경궁 한번 가자라고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드디어 만나는 날이다. 제일 팔팔한 요산이 진행을 맡았다. 혜화역 부근 통영집에서 도다리쑥국에 아귀찜으로 점심을 하고 창경궁까지 약 500m를 걸어갔다. 서울 사람이 다 된 친구들이 아직까지도 창경원 시절만 기억하고 있었다. 

 

 

전문 사진가는 아니지만 홍화문을 중심으로 창경궁 전체 사진을 갖고 싶었다. 홍화문 앞은 횡단보도, 버스정류장으로 항상 붐비는 곳이다. 건너편에 서울대학병원 암병동이 있다. 테라스 같은 공간이 있어 무작정 올라가 봤다. 행복정원이라며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궁궝 조망이 훌륭했다. 북악산 자락에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지붕과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弘化門(보물 제384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조선 시대 1484년(성종 15)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다시 지었다.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건물 중 국보 명정전과 보물로 지정된 홍화문, 명전문, 통명전이 그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경궁 옥천교(보물 제386호)

조선 시대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건설할 때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북악산에서 발원하여 창경궁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흐르는 금천 위로 홍화문에서 명정문을 지나 명정전까지 일직선 상에 놓았다. 명정문 삼문 안으로 바라보는 명전전은 신비할 정도로 위엄을 자아낸다. 

 

 

금천(옥천) 

북악산(배산)에서 발원한 금천(임수)은 춘당지를 거쳐 궁월의 내, 외전을 가로질러 흐른다. 금천 주변으로 봄바람을 불러오는 매화를 비롯하여 살구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가 저마다 고운 빛깔을 쏟아내는 가운데 마른 금천 위로 봄이 몰려온다. 

 

 

살구나무(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활엽 소교목 식물) 한방에서 살구씨를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두나무 (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활엽 소교목 식물) 오얏나무(李花)하기도 하고 짙은 보라색 열매 때문에 紫桃로 불리다가 자두로 변하다.

 

 

매화나무(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활엽 소교목식물)는 봄의 전령이다.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早梅, 冬梅, 雪中梅, 春梅로 부르고 꽃의 색깔에 따라 靑梅, 白梅, 紅梅 등 다양하게 부른다.  

 

재경대구동인 초딩 동기들

      

 

명정문 회랑, 남북십자각, 남십자각 자리 주자소

 

 

창경궁 明政門 및 행각(보물 제385호)

조선 시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다시 지었다.

 

 

명정문에서 바라본 명정전 일원 전경이다. 가운데 가마가 지나가는 어도이고 바닥에는 박석을 깔고 품계석을 놓았다. 품계석은  당초 없던 것을 복원하며 놓았다고 한다. 2단 월대 위에 정전인 명전전과 행각 너머로 편전인 문정전 지붕이 보이고 뒤로 보이는 숲은 창덕궁 일원이다.  

 

 

창경궁 明政殿(국보 제226호)

명전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조선 시대 1484년(성종 15)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 다시 지었다. 조선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신년 하례식과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월대 계단 가마로(쌍봉)

 

 

명정전 천정의 봉황 조각, 바닥, 용상, 일월오봉도, 닫집 단청 등 내부 모습이다.

 

 

드므(방화수 용기)

무쇠롤 만들었다. 월대 모서리에 설치하고 방화수를 담아 火魔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게 했다. 

 

 

명정전에서 문정전과 상문당으로 연결하는 복도각은 왕이 다니는 길이다.

 

 

문정전 전경

 

 

文政門

 

 

文政殿

편전으로 왕의 집무실의 중심 건물이며 역대 많은 왕과 왕비의 혼전(魂殿)으로도 사용했으며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신주를 모시며 휘령전이라고 불렀다. 휘령전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28세의 나이로 죽게 했다. 

 

 

崇文堂

왕의 서재이자 신하들과 경연(공부)을 하던 곳이다. 

 

 

빈양문에서 바라본 창덕궁 낙성대 구역 담장과 꽃단지 

 

 

賓陽門은 복도각 끝에 있으며 내전으로 출입하는 문이다.

 

 

창덕궁 담장 꽃단지 개나리, 진달래, 매화, 앵도, 풀또기가 가즈런히 자라고 있다.

 

 

200년 수령의 향나무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누워 천 년 주목

 

 

5층석탑 ('이왕가박물관'시절의 야회 전시품)

 

 

涵仁亭(함인정)

창경궁의 지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중심에 있는 정자이다. 외전과 내전을 가르는 중간 장소에 자리 잡아 함인정에 걸터앉으면 궐내각사 터는 물론 동궁지까지 창경궁 핵심 구역을 다 지켜볼 수 있는 곳이다. 구경은 아래 것들 시키고 상전은 지켜보기만 해도 되는 그런 자리이다. 

     

 

내전 일원

 

 

歡慶殿

왕의 침전으로 중종이 승하했고 소현세자가 청나라 인질을 끝내고 돌아와 머문 곳이다. 왕과 왕비의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사용했다.

 

 

 景春殿

왕비와 왕대비의 공간으로 성종이 생모인 인수대비를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이곳에서 인수대비가 세상을 떠났고 사도세자의 정부인 혜경궁 홍 씨가 정조를 낳았고 세상을 뜬 곳이며 헌종도 여기서 태어났다. 이렇게 왕가의 죽음과 탄생이 깃들여진 건물이다.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과 붙어 있는 집복헌에 정조가 얘꼈던 수빈 박 씨의 처소가 있어 정조는 영춘헌에 자주 들러 서재와 집무실로 사용한 했으며 승하한 건물이다. 

 

 

집복헌

궁궐의 건물은 용도에 따라 殿, 堂, 齋/軒를 끝자리에 붙인다. 전은 왕이나 왕비가 사용하는 건물을 말하며 당은 한 단계 낮은 건물로 전의 부속 건물로서 사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이고 재/헌은 왕실의 가족이나 후궁이 사용하는 건물을 말한다. 집복헌은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 씨로부터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 씨로부터 순조가 태어난 건물이다. 

  

 

통명전과 양화당

 

 

창경궁 通明殿(보물 제818)

통명전은 조선 시대 1484년(성종 15)에 세운 건물로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광해군 때 고쳐 짓고 정조 때 다시 화재로 전소한 것을 1834년(순조 34에)에 현재의 모습으로 지었다. 내전에서 으뜸 전각인 왕비의 침전인 법전으로 연회와 빈전으로도 사용하던 곳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와 장희빈과의 삼각관계가 결말 난 곳이기도 하다. 

 

 

養和堂

통명전의 부속 건물로 왕비가 손님 접겹 장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다. 

 

 

통명전 옆 천연샘인 열천의 물을 끌어와 연지를 조성하고 장대석으로 돌난간을 두르고 연못에 괴석을 세우고 돌다리를 놓아 아기자기하게 만들었다.

 

 

창경궁 함양문 (창덕궁 출입문)

 

 

자경전터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전각 자리 '한중록'의 산실이었다고 한다. 내전 뒤뜰 언덕바지에 햇빛은 하루 종일 지나가고 양지바른 집은 사라지고 식목이 우거졌다. 

 

 

자경전터에서 바라본 내전 일원

 

 

미선나무(물푸레과 미선나무속 낙엽 활엽 관목 식물)는 흰개나리라고도 하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토종식물이라고 한다. 

 

 

괴석은 "이왕가박물관' 시절의 야회 전시품

 

 

해시계(양부일구)

 

 

창경궁 풍기대(보물 제846호)

풍기대는 조선 시대 1732년(영조 8)에 만든 높이 228cm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깃발을 세우는 화강암으로 만든 臺이다. 

 

 

성종대왕태실 및 태실비 '이왕가박물관' 시절의 야회 전시품 

 

 

창경궁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

1층 몸돌에 새겨진 탑의 명문에는 1470년(성종 원년) 요양성에 있던 명나라 탑이다. 일제 때 창경궁 자경전터에 '이왕가박물관'을 세울 때 골동상이 만주에서 가져온 것을 매입하여 연못 옆에 세웠다고 한다. 조악하게 만든 중국 것을 왜 보물로 지정하고 창경궁에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없다. 

   

 

춘당지는 본래 왕실의 임금이 논농사를 체험하는 내농포(內農圃)를 일제 때 연못으로 조성한 곳이다. 춘당지 주변은 식물원 못지않게 100여 종 우리 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무마다 귀한 이름표를 달고 있어 나무공부가 머리에 속속 들어온다. 조선왕궁의 나무들은 궁궐과 함께 500년 궁중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말을 걸면 어떤 대답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역사가 궁금하면 고궁을 찾아 나선다.      

 

 

회화나무(콩과 고삼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중국에서는 귀신을 쫓는 상서로운 나무, 우리나라에서는 학자나무, 이런 이유로 궁궐, 서원, 문묘, 양반마을 등에 심었으며 천 년을 산다 하여 정자나무로도 많이 심었다.  

 

 

귀룽나무(장미과 벚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봄이 시작하면 산지의 나무 중에 연두색 잎을 가장 먼저 내밀어 숲을 겨울잠에서 깨우게 하는 나무다. 

 

 

말채나무(층층나무과 층층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복자기나무(단풍나무과 단풍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버드나무(버드나무과 버드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느티나무(느티나무과 느티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小춘당지는 백련지 백련담 등으로 원래 연못으로 내농포 논에 물을 공급는 역할을 했다. 

 

 

永春門

창경궁 탐방로를 구석구석 최외각으로 돌면 약 7km가 된다. 외전과 내전 충당지와 대온실을 돌아 나오면 대략 3km 건물과 시설물은 다 돌아보게 된다. 창경궁 영춘문이다. 현판은 창덕궁 쪽에 달려있다. 관광객들의 왕래가 뜸해 쉬어가기 적당한 장소이다. 이렇게 자리 잡으면 옛날 얘기 일색이다. 만날 때마다 했던 얘기 또 하곤 하지만 재밌다고 좋아하며 맞장구치는 것을 보면 옛날이 그리운 나이인가 본다. 

         

 

창경궁 대온실(국등록문화재 제83호)

대온실은 1909년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인이 시공한 주철골 구조에 목조가 혼합된 구조물에 유리로 지은 철과 유리를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관덕정(射亭) 활쏘기를 위한 정자

 

 

月覲門(월근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경모궁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문이라고 한다. 매달 찾아뵙는다고 하여 월근문이라고 했다.  

 

 

백송(소나무과 소나무속 상록 침엽 교목 식물)

 

 

주목(주목과 주목속 상록 침엽 교목 식물)

 

 

춘당지 외국인 관광객

 

 

히어리(조록나무과 히어리속 낙엽 활엽 관목 식물)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뿌리와 줄기가 뒤엉켜 자라는 연리목이다.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살얼음판 같은 궁중생활 비유한 나무라고 한다. 

 

 

명정문 북쪽 행각 광덕문을 통해 청경궁 정문으로 나가는 길이다. 춘당지 일원 답사를 마치고 창경궁 남쪽의 궐내각사터와 동궁지로 이동한다. 내, 외전을 돌아 나오면 창경궁 답사는 공식적으로 끝난다. 해설사도 충당지 앞에서 해설을 끝내고 돌아갔다. 그다음부터는 자유관람이다. 넓은 천지의 숲에 여러 갈래의 산책로가 있어 어디로 갈지 갈 '之' 자로 걷다 보면 당황스럽다. 창경궁 담을 끼고 크게 한 바퀴 돌며 키 큰나무, 꽃이 많이 달린 나무, 괴목, 특이한 조형물 등을 중심으로 구경하며 산책을 한다. 

   

 

명정문 남쪽 행각 光德門을 나와 궐내각사터, 동궁지로 진행하다.

 

괴목이 된 회화나무

 

금천(북악산 매봉 발원지)

 

 

궐내각사 터는 궁궐내의 왕실과 관련 있는 관청이 있던 자리이다. 

 

 

산수유(층층나무과 층층나무속 낙엽 활엽 소교목 식물)

 

 

선인문은 동궁의 정문이다.

 

 

동궁지(왕세자의 거처) 터는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 곁에 수강궁을 지은 자리이다. 

 

 

창경궁 관천대(보물 제851호)

관천대는 조선시대 천문관측소로 1688년(숙종 14)에 만들었다. 가로 2,9m 세로 2,3m 높이 3m로 화강암으로 석대를 쌓아 천체관측 기기인 간의를 설치하여 천체를 관측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석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종묘관통도로(현 율곡로) 때문에 종묘와 창경궁 간의 단절의 시대를 마감하고 옛 숲길을 원상 복구하여 궁궐담장과 북신문도 함께 복원했다. 

 

 

수양버들(버드나무과 버드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식물)

 

 

진달래(진달래과 진달래속 낙엽 활엽 관목 식물)

 

 

동궁지 일원

 

 

퇴궐

다들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요산 덕분에 창경궁 답사 잘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해 된다. 다음은 창덕궁 주문이다. 창덕궁은 가을에야 제 멋이 나니 그때까지 열심히 걷기 운동하여 튼튼한 하체 기르라고 당부하며 홍화문을 나와 역순으로 혜화역까지 와서 헤어졌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했다.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 태종을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지으며 창경궁이 시작이 되었다. 이어 성종이 궁굴의 모습으로 중건하여 창경궁이라 했으며 창경궁도 어느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난, 화재, 일제침략 등으로 소실과 훼철을 반복하다가 1986년에 들어와서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완료되었다. 일제가 심은 그 많은 창경원 벚꽃은 다 어디로 갔나? 여의도 윤중로로 갔다는 얘기와 서울과천대공원으로 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2023년 0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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