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槍)을 오르고 칼날(劒) 위를 걷다.
밤새 오락 가락하는 비 소리가 양철 지붕을 두드린다. 산장에서는 식수와 생활용수를 빗물에 의존하기 때문에
빗물받이를 위해 함석으로 지붕을 이었다. 고산의 날씨는 수시로 변해 예측 하기가 어렵다. 새벽 5시 일출을
보기 위해 정상 등정을 서두른다. 4시에 일어나 바깥을 나가봤다. 구름 속에 안개보단 조금 굵고 이슬비보단
조금 가는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묵묵히 지켜보기를 1시간여 날씨가 바뀔 조짐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야리가다케 산장에서 찍은 정상 모습 (박은숙 님 촬영)
산장(3,060m)에서 정상(3,180m)까지 상대적인 고도는 120m 차이가 난다. 산술적으로는 20분이면 올라가고
10분이면 내려온다. 실제로는 30분 올라가고 20분 걸려 내려온다. 정상에서 한 10분 머문다면 1시간이 소요
되는 셈이다. 절벽을 철사다리와 쇠사슬을 이용해 오르내린다. 북알프스 360도 파노라마 전망을 놓여 안타깝
기 그지없다.
야리가다케 정상(Hkang 님 촬영)
야리가다케는 일본 중부 산악공원 지대 산맥의 하나인 히다산맥의 중심 산이라고 하며 산맥의 중앙에 자리
잡고 3,000m가 넘는 기묘한 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알프스로 더 알려져 있다. 히다산맥의
주요 지질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라시아와 태평양 지각판이 서로 부딪치며 동서 압력으로 솟아오른
습곡산맥 비화산 산지라고 한다. 일본 하면 화산이 먼저 떠오르지만, 산맥의 남쪽에는 야케다케(燒岳)라는 화산
이 버티고 있다.
야리가다케 산장(Hkang님 촬영) 모습
(05:45) 날씨 관계로 산장 관리인이 새벽부터 나와 정상 등정을 통제하고 있다. 망연자실한다. 산장은 등산로
시설물 유지, 보수, 관리를 맡고 있으며 입산을 통제하는 권한도 있다. 산장연합회 같은 민간 조직이 있어 산장
을 운영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위탁을 받아 자율적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일출은커녕 등정도 못 하게 됐다. 나 같은 사람들이 혹시나 날이 갤까 노심초사하며 앞도 분간 못하는 허공을 바
라보며 탄식을 쏟아낸다. 인연과 운명이 앞을 가로막는다.
(06:45) 날이 갤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순 없다. 오늘 해 빠지기 전에 야리가다케 산장에서 8.3km 떨어진 호다
카다케 산장에 도착해야 한다. 3,000m 넘는 봉 5개를 넘어야 하며 북알프스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로 알려진
미나미다케(中岳)와 키타호다카다케(北穗岳) 사이 약 1km 다이키렛토(大切戶)를 통과해야 한다. 8.3km라면
네댓 시간이면 도착할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고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일제히 안전
모를 착용하고 배낭 커버를 씌우고 완전무장하여 안개비 속으로 대열을 지어 쓸쓸히 발길을 옮긴다.
야리가다케 캠프장 입구 이정표에 우리말 표기가 이채롭다.
캠프장 통과
산장 옆 완만한 경사지에 텐트를 칠 수 있도록 구획과 평면 작업을 해 놓은 상태.
능선 오르내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07:15) 오오바미다케(大喰岳 3,101m) 통과
김정렬 님 부부
내외가 지칠 줄 모르는 강력한 체질을 타고난 분이시다. 왕년에 클라임도 입문하셨고 국내산은 비좁아 이제는
해외 원정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이 정도쯤 되면 산행 매너도 경지에 올랐다. 일행들의 앞뒤를 오가며 안전하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다 쓴다. 마지막 봉우리 기타호다카다케를 목전에 두고 사생결단
하고 있는데 내 꼴을 보고 미리 도착했다가 다시 내려와 "형님 배낭 주이소" 라는 말에 울컥했다.
樂山
고도 3,000이면 공기 중 산소의 비율이 30%가 떨어진다. 젊은이는 잘 못 느껴도 노인들은 바로 표가 난다. 호
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천근만근에 종아리 근육에 통증까지 온다. 어제 야리가다케 오를 때 종아리 쥐가 날 것
같은 조짐에 무척 조심했다. 아침에 출발 전 약(잘데나)도 먹고 통증을 유발하는 부위에 멘소래담로션도 듬뿍
발랐다. 에베레스트 트래킹 유경험자로서 고산증세에 철저히 대비한다. 물을 자주 마시고 많이 쉬고 천천히 걷는다.
오오바미다케(大喰)
토우야쿠린도우(当藥龍膽 당약용담 とぅゃくりんどぅ)
구름떡쑥
이와벤케이(바위돌꽃 ぃゎべんけぃ) 꿩의비름科
출발한 지 2시간이 경과했는데도 아직도 구름 속을 걷는다.
하시고(梯子 철계단 はしご )
이 정도의 난이도는 국내 산에서도 흔하다. 통영 사량도를 위시하여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07:55) 나카다케(中岳 3,084m) 도착
나카다케 정상 기념촬영
칭구루마(稚兒車 치아차 さんぐるま)
너덜 고원 통과
라이쵸 (雷鳥 뇌조 らぃちょぅ) 일본 특별천년기념물 들꿩과의 고산지대에 사는 새
(08:35) 드디어 파란 하늘이 구름 사이로 나타나 해발 3,000m 능선이 그림처럼 선명하다.
서쪽 기후현 방면
나카다다케(中岳) 남쪽 사면의 만년설과 빙퇴석 지대를 통과한다. 흙, 모래, 자갈, 큰자갈, 돌들이 크기 順으로
쌓여 있다. 수천만 년 암석의 풍화작용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어느것 하나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찰나(刹那)
의 인생 구구절절이 엮어 반추한다.
요산의 하루
너덜겅 흰 마루 따라가기
일행 중 김 여사가 등산화 앞창이 벌어져 철사로 동여매고 걷는데 자꾸만 느슨해지니깐 걷기가 불편한 모양이
다. 자주 엎드려 바로잡다 보니 진행이 더뎌진다. 다들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하지만 미숙해서 그런 일이 생기
는 것이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다.
(09:05) 덴구바라(天拘原 빙하공원) 분기점을 2시간 20분 예정시간(2시간 40분) 내에 통과하다.
(09:30) 미나미다케(南岳 3,032m) 도착
오오바마다케(大喰岳), 나카다케(中岳), 미나미다케는 주릉에 있는 3,000m가 넘는 산봉우리이다. 한마디로 민
둥산 수준이어서 표지목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정도다. 아직도 산자락엔 구름이 가득하여 별 감동도 없이 가는
길만 제촉한다.
미나미다케 정상 기념촬영
해가 떠 대지가 달구어지고 기류가 상승하여 구름이 산 위로 올라온다. 감춰진 산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드러내
며 위용을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북알프스 능선에서 가장 험하고 무섭고 위험하다는 다이키렛토(大キレット)
구간이 서슬을 시퍼렇게 들어낸다. 우리나라 계룡산 자연성릉의 5배 정도 크고 넓고 높다고 상상하면 되겠다.
미나미다케고야(南岳小屋)
(09:40) 미나미다케고야(南岳小屋)까지 약 4km 예정시간 3시간에 맞추어 정확히 도착했다. 잠시 쉬었다가
(09:55) 미나미다케고야(南岳小屋) 출발하여 사자코전망대를 거쳐 바야흐러 험난의 길로 접어든다.
(10:00) 다이키레토(大切戶 タィキレット) 기점이다. 미나미다케에서 키타호다카다케까지 2.65km 예정 소
요 시간은 3시간 30분이다. 예정 시간은 일본 지도에 표기된 시간을 말한다. 다이키렛토 코스를 잠시 설명하면
일본 알프스에서 가장 험난한 코스로 소개하고 있으며 장장 2.65km를 고도 400m를 하강했다가 500m를 상
승 하는 절벽이 낀 암릉이다. 능선을 창(槍), 칼(刀), 톱 등 잘 못 하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연장에다 비유하여
간담을 서늘케 하며 절벽을 철사다리, 쇠사슬로 이동하고 너덜겅은 네발을 써야 한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를까.
너덜지대 통과
암봉 고랑 사이로 난 길
산사태 눈사태 통로가 되는 계곡을 잠시 내려가다가 우측 능선으로 붙는다. 미처 쓸려가지 못한 바위들이 위태
롭게 버티고 있다.
우사기기쿠(兎菊 토국 ぅさぎぎく)
절벽 내려서기 이 정도 코스는 관악산에도 많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낙석 유발에 조심하며 만약에 돌이 구를 때 "낙석"이라는 구호도 상기시킨다.
다이키렛토 전 구간을 볼 수 있는 곳까지 왔다. 구름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우리나라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장엄한 경관이다. 大切戶(다이키렛토)란 산의 중간을 끊어 뚫고 파내어 따로 갈라 놓은 것 같은 떨어진 형태를
일컫는 모양이다.
다이키렛토(大切戶 大キレット) 전 구간 전망
하단부 능선까지 내려가 긴 톱날 능선을 따라 걷다가 長谷川(はせがゎ)피크에 올라 사방 경관을 조망한 후 끝
에 보이는 산 봉우리 키타호다카다케에 오른다.
하강 중
하시고(梯子 쇠사슬 はしご) 구간
쿠사리(鎖鏈 철사다리 くさり) 구간
(11:00) 다이키렛토 기점에서 바닥까지 500m를 하강하여 능선 시작 지점에서 약 1km 너덜, 요철, 칼바위 구
간을 통과 한다.
다이키렛토 너덜 구간
키타호다카다케(北穗高岳)
하세가와 피크 (長谷川 ピク)
長谷川은 긴 골짜기를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강은 눈 씻고 봐도 없고 강처럼 구불구불 흘러가는 다이키렛토
능선 뿐이다.
다이키렛토 통과 중
하시고(梯子 쇠사슬 はしご) 구간 통과
빨간선으로 키타호다카다케 등로 표시
키타호다카다케의 위용
(12:30) 키타호다카다케를 오른다
키타호다카다케 동북벽 마지막 정상 부분은 네 발로 지그재그로 오른다.
(14:30) 키타호다카다케 小屋
산장에 도착하니 선두는 오늘 목적지 호다카다케 산장으로 이미 출발했고 가이드가 심각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
다. 다들 걷느라고 힘이 빠져 야리가다케 산장에서 싸 준 주먹밥을 손도 안댔고 도착하는대로 컵라면을 안겼지
만 국물만 조금 마시고 내팽개친다. 아직 단체팀 장정 3명이 도착 전이다. 알고보니 사전에 단체팀은 체력 고갈
로 더 이상 진행이 불가하다는 뜻을 가이드에게 전달한 상태이었다. 나도 초행이기 때문에 가이드의 결정에 따
를 수 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가이드가 현재 사장님 속도로는 일몰 전에 도착하기
는 힘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일정을 포기하고 후미팀을 이끌고 하산하기로 한다. 가이드를 떠나 보내고 우린
예정에 없는 키타호다카다케 산장에서 1박을 한다.
2018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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