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조선일보 선정 산/거창 우두 기백 금원 현성산

거창 우두산 고견사 탐방

안태수 2020. 12. 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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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은행나무가 고찰을 지키다.

 

절은 왜 산으로 갔을까?

산의 좋은 자리는 절이 다 차지하고 있다.

옛날에야 주인이 없는 땅이니깐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지만 그 후 지번이 부여되며 주인이 다 생겼다. 

절은 천 년 전 신라 때부터 눌러앉았다고 권리를 인정받은 것인가. 그래서 명당에 자리 잡은 절은 의상, 원효, 자장 같은 고승의 창건 설화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하지만 동의할  수 없고 산이 정진 수도처로 좋은 환경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고견사도 그 옛날에야 지금 가조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백리가 넘는 길을 걸어 부처님 뵈러 가는 길이 고행이었고 지금도 고견사 주차장까지 차를 몰고 와 주차장에서 너덜한 계곡을 따라 절까지 1,2km를 올라가는 일이 등산이나 다름없다.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입구

 

견암폭포

 

모노레일은 물자를 실어 나르는 게 주요 임무, 그리고 용무가 있는 사람, 종사자, 스님 등이 이용하고 참배객은 불가. 

   

고견사 탐방로

 

금강문(牛頭山古見寺)

 

고견사 전경

삼국시대 신라의 원효가 창건한 견암사(見岩寺)라고 한다.

신라 667년 (문무왕 7) 때 의상의 이름을 따 온 峰 아래 원효가 창건하고 고려 1,360년(공민왕 9)에 중창하고 조선 1,630년 (인조 8)에 중건하며 고견사(古見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귀한 보물이 없는 게 옥에 티다. 

고견사는 의상의 이름을 따 온 峰 아래 원효가 667년(문무왕 7) 창건했다는 절이다.

우두산 의상봉 아래 해발고도 800m가 넘는 가파른 산비탈에 축대를 쌓고 만든 산지 사찰이다. 

 

최치원(崔致遠, 857 ~?)의 지팡이 꽂은 자리에 자라 난 은행나무가 1,000 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천 년이라... 

 

은행나무 주변 꽤 너른 공터이다. 한 숨 돌리게 좋다. 

 

석주

 

전나무

일주문 대신 손색이 없는데 위치가 거시기해서

 

사천왕문(別有山四天王門)

別有山은 보통산과는 다르며 인간이 살지않는 별천지라는 의미이다. 

 

대응전

 

거창 고견사 동종(보물 제1700호)은 대웅전에 봉안 중이며 1630년(인조 8년)에 설봉(雪峯)이 만든 기념비적 작품이다.  특이한 점은 다른 동종과 달리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 기간, 제작에 들어간 물품 등을 기록을 새긴 기문(記文)의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대웅전 전경

 

나한전

 

범종각

 

석조여래입상

 

사성각 전경

 

사성각( 칠성, 독성, 산신, 용왕)

 

마애불

 

주요 전각은 대웅전, 나한전, 범종각, 사성각, 요사체 등이다.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이렇게 높은 곳 햇빛이 잘 드는 평평한 땅은 절터로 안성맞춤이다.

우리나라 1,000m 넘는 고지에 있는 절 중 내가 가 본 곳은 지리산 법계사(1,450m), 설악산 봉정암(1,224m),

치악산 상원사(1,084m)가 있다.

산에 오르는 즐거움 때문에 부처님 뵈로 간다는 생각은 못 하고 등산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만난 것이다.

절을 내려가면서 왕복 2,4km나 되는 산길을 계곡과 언덕을 넘나들며 오르내리기란 불심이 지극하지 않으면 힘들겠다. 젊은 불자의 입문은 더디고 나이 든 불자는 빛의 속도로 사라져 가니 저 꼭대기 절의 앞날이 걱정되누나. 

            

 

 

 

 

 

2020년 1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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