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공 이삼평의 영혼이 살아 있는 곳 아리타
도자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일본 도자陶磁 神 조선 도공 이삼평의 묘를 찾아나섰
으니 자기 조상 묘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다. 09시 우레시노 와타야벳소 온천장
을 나와 아리타 역까지 약 15km를 30분에 걸려 도착했다. 아리타의 최종 목적지는 이삼평의 도산신사, 추모비,
이삼평의 묘, 이즈미야마 도석장, 석장신사이다. 내비는 이곳 명칭으로 검색이 잘 안돼 아리타 역을 목적지로
정하여 찾아왔다. 역 구내 관광안내소가 있다. 친절한 안내를 받으면서 앞으로는 내비를 부정확한 명칭으로 검
색하기 보다 이런 공공기관을 검색하여 도움을 받는 게 훨씬 났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어가 가능해야 하지만.
(09:25) 아리타 (사가 현 니시마쓰우라 군 아리타 초)
아리타는 일본 도자기의 발상지, 아리타에 일본 최초로 도자기 가마를 연 사람은 조선 도공 이삼평 그는 아리타
를 일본 제1의 도자기 마을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다. 도자기의 해외 수출의 길이 열리고 이마리, 아리타는 도
자기 산업으로 번창한 마을이 된다.
아리타 역 구내 관광안내소
도산신사陶山神社
아리타 역에서 차로 5분 거리 JR 철도가 지나는 언덕배기에 철로와 붙어서 절문인 도리이가 서 있고 가파른 산
기슭에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차는 신사 앞 마당까지 올라간다. 일본 신사는 어딜 가나 역시다. 신사 제신들의
권위가 높을 수록 신도들의 봉헌 봉납물이 많아 다 전시하다보니 귀신이 나올 것 같이 엄습하다.
박さん과 樂山
신사 계단 오르기
도자 신사 답게 신사 계단 끝 본전 마당 앞에 청화백자 도자기로 만든 도리이가 서 있다.
청화백자 도리이
본전 마당에는 도리이, 고마이누, 항아리 등 도자기로 만든 각종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도산신사 전경
도산 신사에는 오징 천황(4세기 백제계), 나베시마 나오시게(임진왜란 때 나베시마 번주), 이삼평(조선 도공) 3
명의 제신을 모시고 있다.
도조 이삼평 비 가는 길은 신사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잘 꾸며진 언덕길을 따라 구불구불 약 300m 정도 올라가
면 사라야마 중턱에
도조의 언덕
언덕 정상에 큼직한 화강석 비석이 하늘로 솟아 있다. 도조 이상평의 비. 파란 하늘 울창한 숲 속에 제법 규모가
큰 제단이 놓여 있다. 저 정도의 규모라면 조선 왕의 직계 능 원 수준,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수준의 예우다. 아
리타 지역 주민들이 이삼평이를 아리타를 빛낸 인물로 얼마나 추앙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석축으로 제단을 쌓고 양쪽에 계단을 설치하고 중앙에 고마이누 석등을 비치 상단에는 화강석 비석을 세우
고 아리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1917년 아리타 도자기 창업 300주년 기념사업으로 주민들의 협조로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5월 도조제를 연다
고 한다.
도조 이상평 비(陶祖 李參平 碑)
大正(1917) 6年 10月 기념비 세움
아리타초 전경
다음 방문지는 이삼평의 묘가 된다. 도조의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아리타 마을 중앙 산과 경계를 짓는 곳으로 이
삼평의 초기 가마터가 있던 곳이다. 아리타 마을 주민 대다수는 지금도 도자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시라카와 공동묘지
우리는 이삼평의 묘가 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신사도 있고 독자적인 비석도 세워졌
다면 묘지 또한 거창하게 조성되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바람에 공동묘지를 옆에 두고 엉뚱한 곳을 찾아다녔
다. 마을 끝 지점에서 한 남자에게 이삼평의 묘 위치를 물으니 하던 일을 멈추고 자전거에 올라타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공동묘지 도착 많은 묘 가운데 이삼평의 묘 앞까지 안내한다. 일본 사람의 친절에 탄복한다.
공동묘지 입구 안내판에 아리타 역사적 인물이 잠든 곳이라면서 이삼평의 이름도 올려져 있다.
비문
17세기 초 아리타, 시라카와에서는 일본에서 최초로 자기를 구웠습니다. 그 도자기 장인들의 집단을 이끈 이가
정유재란 때 조선에서 데려온 이삼평 즉 초대 가나가에 삼베에(金ケ江三兵衛)라고 합니다. 아리타초에서는 창
업 300년을 맞아 1916년에 도산 신사 뒤편 언덕에 「도조 이삼평의 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려왔습니다.
1959년에 이곳 시라카와의 공동묘지에서 월창정심거사(月窓淨心居士)라는 계명의 묘비가 발견되었고 1967
년에는 그것 이 이삼평의 무덤이라고 확인되자 즉시 마을의 사적으로 지정하였습니다 (1967년 3월 20일 아리
타초 교육위원회)
이삼평의 묘를 둘러보며 숙연한 김さん과 박さん
平成16年(2004) 3月 吉日 도조 이삼평공 헌창 위원회 비석 건립
이삼평이 묻힌 시라카와 공동묘지에서 이즈미야마 도석장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이삼평이라는 도로 표시판이
반갑다.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 가장자리에 아리타 이즈미야마 구라는 표지석이 있고
그 뒤로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 양옆으로 가마를 본 딴 벽돌조 도공의 碑와
「이삼평발견之자광지」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즈미야마 도석장
산봉우리가 몇 개는 날아갔을 법한 거대한 구덩이가 허옇게 입을 벌리고 있다. 이삼평이 나베시마 번 지역을 돌
아 다니면서 발견한 백토 도석장은 노천광으로 나무만 걷어 내면 하얀 백토가 단단한 돌로 묻혀 있다. 지금도 공
식 채취는 안 되지만 연구용으로는 가능한가 본다. 기념으로 몇 개 주워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지난 얘기지만,
일본을 떠나올 때 주운 돌(엄지 손가락 크기) 두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 옆 포켓에 쿡 찔러 넣고 검색대를 무
사히 통과했다. 인천 공항을 나와 맨 먼저 배낭 포겟을 확인하니 없어졌다. 누가 제거하였는 지 무척 궁금하다.
도석장 옆으로 작은 산기슭을 따라 오솔길이 나 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신사가 있는데 안내판에 석장신
사(石場神社) 그 옆으로 고려신사(高麗神社)라고도 표기하고 안내판에는 도석장에서 일하는 조선 도공들이 세
운 신사로서 조선사람은 조상인 고려인을 섬기는 풍습의 일환으로 석장신사 숨겨진 곳에 고려신을 별도로 모셨
다고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신사
신들의 거처가 을씨년스럽다.
본전 오른쪽 한칸짜리 건물에 한복을 입은 백자 이삼평 조각상이 신사의 주인임을 말해준다.
李參平은 누구인가 먼저 출생지는 충남 공주로 추정하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고 1594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와 당시 사가 번의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영지에 거주하면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지내왔다. 1616
년 아리타 이즈미야마에서 양질의 백자석을 발견하여 본격적인 도자기 생산에 들어간다. 1656년 사망 때까지
아리타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육성한 공로로 일본의 도자기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李參平公像
고려신사
석장 신사 한쪽에 고려신이라고 표기된 작은 돌탑이 있다. 받침석에는 철판으로 만든 도작은 도리이가 붙어 있
고 고려신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진 빗돌이 얹혀 있다. 석장신사 숨겨진 곳이라는 게 이것을 말하는 건가?
(11:30) 석장신사를 마지막으로 이삼평의 도자기 기행은 끝난다. 이삼평이가 조선에 계속 있었다면 어떤 인물
로 살았을까? 한국 도자기 산업을 일본에서처럼 초석을 깔았을까? 부질없는 질문을 던져본다. 조선의 도자기는
일상에서 쓰이는 단순한 생활 용기지만 일본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히데요시가 탐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해
조선을 침공한 그의 가신들은 조선 도공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고장으로 끌고 가 경쟁적으로 도자기 만
들기에 들어간다. 영주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며 도자기 만들기에 들어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서 삶은 어
땠을까? 오늘날 한국의 도자기 산업의 현실을 보면 그 답이 있을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메모하는 데도 정신없다. 사가 현을 끝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나가사키로 간다.
2016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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