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해안길을 달려 다산초당 가다
스마트폰으로 기상청 일기예보에 접속하여 땅끝마을 해돋는 시간을 학인하고 알람으로 지정한다.
조그만한 해변 마을은 어두움이 깔리자 파도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 남녁을 하루종일 해매고 다닌 심신의
신음 소리와 함께 바다에 묻힌다.
땅끝 숙소에서 창문을 연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두근 거리 가슴과 함께 일출을 본다. 붉은 하늘은 차츰 흰 점으로 바뀌며 물 위와 산으로
옮겨 다니다가 바다로 내려 앉아 긴 그림자를 낳는다.
편의점이 없는 곳이 없다. 점심으로 김밥과 커피를 타기 위한 뜨거운 물을 준비한다.
아침을 안 먹은지도 오래 됐다.
서른살 쯤 테니스를 시작하면서 아침운동 하고 밥까지 먹고 출근하기가 힘들어 아침밥을 거르던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가장이 아침을 거르니 애들도 아버지를 따라하고 마누라는 귀찮은 일거리 하나 줄어
든다는 것으로 내심 반긴 것이다.
요즘 웰빙 바람을 타고 하루 식사 끼수를 가지고 말이 많다. 나는 그런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직업과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이로운 쪽으로 몰고 갈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의 뜻이고 건강하게 사는 것은 본인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땅끝에서 해안을 따라 북진하는 해안도로는 문화생태탐방로, 삼남길, 한국의 아름다운길 같은 이름이
붙여져 있다.
해안 도로「한국아름다운길」은 좌측으로 달마산 암릉 능선을 보면서 우측으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다가
북평면사무소에서 완도대교와 갈라져 내륙으로 들어간다.
해남 북평면 달마산(達摩山) 능선과 산정
주작산(朱雀山)
덕룡산(德龍山)
덕룡산/석문산 능선
땅끝 해안선을 따라 국토 지맥은 계속 이어진다.
해남강진(달마산, 주작산, 덕룡산, 석문산, 만덕산), 장흥 천관산, 고흥 팔영산.
산 높이도 400~700고지 사이, 바다에 면해 있고 바위 색갈도 회색빛을 띄고 암릉 형태도 비슷해서 같은
時에 태어난 쌍둥이를 보는 듯 하다.
◇茶山草堂
두물머리(生家 있는 곳)
다산은 1762년 (영조 38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해서
1782년 (정조 7년) 22세 초시, 회시에 합격하여 생원으로 선정전에 들어가 정조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다. 다산(39세)은 정조임금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聖君과 賢臣의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1800년 (정조
24)가 승하하신 후 자신을 알아주시던 임금께서 돌아가셨다고 슬품이 끝이 없다고 묘지문에 적었다.
다산은 1801년 (순조 원년) 천주교 탄압의 빌미로 반대파 숙청 때 천주교인들과 교류한 일을 물어 감옥에
갇혀다가 포항 장기( 조선시대 전국 주요 유배지 중 한 곳)로 귀양간다. 귀양살이 도중 황사영백서 사건이
터져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그 사건과 연류가 없음이 밝혀져 강진으로 다시 유배(18년)되고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지에서 죽는다.
이쯤에서 귀양살이 가는 다산을 상상해 본다. 지금 포장이 잘 된 도로 위로 옛길을 겹쳐 겨울 찬바람을
매섭게 몰아치게 한다.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고 주민들의 냉대까지 받으면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수
소문하다가 변두리 주막집 노파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한다.
다산기념관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에 심겨진 두충나무
①뿌리의 길 (강진 유배의 길)
초당입구에 잘 지어진 한옥과
강진군수(전), 다신계문화원, 다산학당, 다산명가를 운영하며 방문객들을 위한 체험학습, 볼거리, 먹거리
등을 제공하고 찻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삶따라 자취따라 다산 정약용」저자 윤동환선생의 집.
다산과 윤동환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듣고 책도 한권 구입하고 사인도 받았다.
②오솔길 (초당입구에서 초당까지)
茶山은 외가 해남 윤씨 친척(윤단)의 도움으로 읍내(사의재/四宜齊) 거처를 강진군 도암면 귤동 만덕산에
있는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이곳에는 윤단이 천여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는 산정이 있었다.
전각들 너머로 간척만 강진만
구강포(강진만의 옛이름)는 하늘과 맞닿았고
다산 4경은 다 제자리에 있다
藥泉의 물은 다 말라 더 이상 마실 수 없고
연지의 물도 더럽고 지저분하다
석가산은 어린애 돌장난하다가 만 듯 무엇인지 분간이 안되고
소나무와 삼층탑은 꿈에 만들었나 보다
茶를 끓이던 부뚜막으로 사용했다는 다조도
사람이 사용한 흔적은 어데도 안 보이고
부석부석한 표면이 만지기조차 불편하다
초당 뒤 서편 석벽에 굵게 새겨진 丁石 두 글짜는 다산이 직접 새겼다 하니
그나마 위안이다.
다산의 숨결은 어디에서 찾나
서암(西庵)/다성각(茶星閣)
정석(丁石)/다산4경
초당 뒤 석벽에 丁石을 새겨 다산이 살다 간 흔적을 남긴다.
약천(藥泉)/다산4경
물에 젖어 있는 땅을 직접 파보니 돌 틈에서 물이 솟아 나왔다. 약도도 달이고 차도 끓이고 생활용수로도
쓰고
다조(茶山四景)
초당 앞에 평평한 돌이 있어 갈고 다듬어서 차를 끓이던 부뚜막으로 사용
비류폭포
산골짜기 고인물을 끌어다가 연못으로 떨어지도록 하여
연지/석가산(茶山四景)
연못 만들고 바닷가에서 신기하게 생긴 돌을 줏어와 연지석가산을 만들어 소나무 심고 삼층탑 세우니
진짜 산보다 더 멋있구나 했다.
동암(東庵)
1,000여 장서 보관, 손님을 맞이하고 집필 활동을 하던 곳으로 평생에 500여권의 저술과 2500여수의
유시를 남겼고 1818년 8월(순조 18년) 다산 57세의 나이로 18년간 강진 귀양살이에서 풀려 고향 마현으
로 돌아온다.
다산은 해배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도 잠시 "이제 풀려 집으로 돌아간 해도 바람벽만 남은 집에 곡식이라
곤 설전에 다 떨어지고 늙은 아내의 얼고 굶주린 모습, 아이들의의 처량한 모습뿐"을 생각하며 깊은 탄식
에 빠진다.
다산은 1836년 2월22일 75세의 나이로 고향집 여유당에서 일생을 마친다.
③백련사 가는 길 (초당 동암에서 백련사 가는 산길은 차나무밭과 동백나무 숲)
만덕산(萬德山)은 다산이라 불리울 정도로 차나무가 많이 자라 지명과 연루하여 茶山이란 호를 이때 지었
다 한다. 千一閣이 서 있는 자리는 동암에서 백련사로 길목 언덕배기, 강진만이 한 눈에 보이고 전망이
훌륭한 곳이다. 다산은 종종 이 언덕에 올라 돌아가신 정조임금도 그리워하고 나라일도 걱정하고 흑산도
로 유배간 형님도 그리워하며 고향의 가족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백련사
동백나무숲(천년기념물 제151호)
백련사 전경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801~808)가 창건
다산 정약용과 교류한 아암 혜장선사 다산은 백련사에 자주 들려 아암과 차를 나누면서 유배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동백나무, 차나무, 구강포, 만덕산은 백련사의 주요 얘기다.
만경루 앞 배롱나무
죽은 것 같아 이리저리 살펴보니 숨쉬는 기척이 없다.
수피가 메끄러워 만지면 간지럼 타고 원숭이가 미끄러진다는 베롱나무
지나는 스님 붙들고 죽었느냐 여쭈니
7월에 붉은 피를 토 할거라 한다.
봄이 다 끝나가는데도 아직도 자는 놈이 있구나
만경루(萬景樓)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씀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가 씀
만덕산백련사(萬德山白蓮寺)
현판 글씨는 신라시대 명필 김생의 글씨를 집자 함
명부전(지장보살)
명부전의 시왕
전각들 너머로 구강포(강진만의 옛이름)
다산 초당에 8시경 도착하여 백련사까지 오전 10시에 구경을 마치고 장흥 천관산으로 이동한다.
항상 산을 우선으로 길을 정하기 때문에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넘어가는 옛길은 아쉽게도 빠트렸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고 하지만 말데로 쉽게 될지...
다산이 외로움울 달래고 유배생활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를 받기 위해 찾던 백련사, 지극히 사적인 길이
아닌가 나도 그런 길 하나 있었으면.
2013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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