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소문따라/강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 정약용 유적 답사

안태수 2022. 6. 20.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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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유적 쓸고 닦아 다산이 떠나면 마을도 사라진다

 

 

해남 북평면 남창리 교차로에서 완도를 빠져나와 55번 지방도를 타고 바다는 멀리 산은 가까이하면서 추자도, 완도,

청산도, 바다가 얼마나 되었을까 벌써 산의 그리움에 사무친다. 낯 익은 산맥이 운전석 차장으로 계속 이어진다.

중이 비 맞은 것처럼 산 이름 고개 이름 하나하나 중얼거린다. 도솔봉 달마산을 두륜산과 가르는 닭골재, 두륜산을 주작

산 덕룡산과 나누는 오소재, 주작 덕룡을 지날 무렵에는 차를 아예 갓길에 대고 화려한 바위능선을 사진에 담았다.

완도에서 소석문 입구 만덕리 다산초당까지 약 45km 꿈같이 달려왔다.

     

(10:20) 다산 유적지 주차장 도착

산에 다니면서 이 부근을 여러 번 지나쳤지만 다산초당에 대한 불편한 감정으로 외면하다가 집사람의 요청으로 다시 방

문하게 되었다. 9년 전 다녀 갈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그대로 펼쳐진다. 대궐 같은 민박과 식당,

조그마한 주차장이 예나 지금이나 방문객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다산초당 가는 길

 

 

은행나무집

 

 

다신계 전통 찻집

'다산 정약용'의 저자 前 강진군수 윤동환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기념품과 음료를 팔며 저자가 서명한 책과 다산의 이야

기를 들을 수 있다.

 

 

다산명가(민박) 

 

 

오솔길이라 한다. 계곡 옆으로 난 길로 돌계단과 너설이 번갈아 깔렸으며  좌, 우로 소나무, 편백나무가 우거졌다. 다산

이 다니던 길이였다고 하여 다산의 내음이 어디서라도 풍겨올까 킁킁대며 오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탐방로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조그마한 계곡을 중장비로 들쑤셔 놓아 다산의 향기가 깃든 곳

이란 기대감을 일시에 무너트린다. 세상에 별난 길이 아디 있나! 원래 있던 길 그대로 가꾸어야지 데크를 깔고 나무계단

을 놓고 야자메트를 깐다고 길의 품격이 높아지나? 

 

 

제자 윤종진(순암)의 묘

해남은 해남 윤씨의 본향이며 정약용의 외가다. 윤종진은 다산의 18 제자 중 한 분이며 윤종진의 아버지 윤규로는 정처

없이 떠돌며 강진 유배지 생활을 하던 정약용을 윤氏문중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에 있는 산정(다산초

당)에 거처를 마련해 주시고 극진히 보살피며 후진을 양성하고 저작 활동에 전념을 다 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배려를 하였다.

 

 

丁茶山 遺跡(사적 제107호)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정다산의 유적을 알리는 사적 표석 언제 적 낙엽이 아직까지 표석 주변을 뒹굴고 있나 다산

이 죽고 없으니 망정이지 이것 하나만 봐도 다산 유적지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 지 한탄이 절로 나온다.

 

 

다산초당 전경

 

 

茶山艸堂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던 다산의 단산정을 정약용에게 내주었다. 윤단은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조부이다. 다산은 귤동

마을의 뒷산 이름이고 茶나무가 많았다. 다산의 호도 그렇게 지어졌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 저

작의 산실이며 18 제자들을 가르치며 초당 생활을 스스로 즐겼다. 

 

 

다산초당 전경

 

 

다산 정약용 선생 유상

다산은 1762년 (영조 38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

어나 1783년 (정조 7년) 22세 때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정조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산은 정조 임금이 돌아가

시기 전까지 聖君과 賢臣의 관계를 유지해 오다가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1801년 순조 원년에 천주교 탄압의 빌미

로 반대파를 숙청할 때 천주교인들과 교류한 일을 물어 포항 장기로 귀양 간다. 귀양살이 도중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

나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으나 연루된 사실이 없어 죽음을 면하고 강진에서 18년 간 유배 생활에 들어갔다.

1818년 8월(순조 18년)에 귀양살이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1836년 2월 22일 75세의 나이로 고향집 여유당에서 돌

아가셨다.

 

 

茶星閣(西菴) 

윤단의 산정에는 집이 두채에 1,000여 권이나 되는 장서가 쌓여 있었다.  

 

 

茶山東菴, 寶丁山房, 松風樓

 

 

天一閣은 1975년에 강진군에서 건립한 정자이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목 강진만이 한눈에 보이는 동암 언덕배

기 돌아가신 정조 임금과 흑산도에 유배된 형 약전과 고향의 가족들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천일각 현판

 

 

丁石(다산 4경)

초당 서편 병풍바위에 '丁石'을 새겨 다산이 살다 간 흔적을 남긴다.

 

 

藥泉(다산 4경)

못가 정자의 서북쪽 모퉁이에 물에 촉촉히 젖은 땅을 직접 파보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 약도도 달이고 차

도 끓이고

 

 

茶竈(다산4경)초당 앞에 평평한 돌을 갈고 닦아 조그마한 부뚜막으로 만들어 차를 끓여 마시다. 

 

 

蓮池石假山(다산 4경)산골 샘물 끓어다 폭포와 연못을 만들고 바닷가 괴석을 주어와 연지석가산을 만들었다.

   

 

천일각 백련사 가는 길

주차장에서 다산초당까지 300m, 백련사까지는 1,100m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우정의 길이다. 야생차 군락

지(천연기념물)와 동백나무가 우거졌다. 다산이 평소 염려하던 초당 초가지붕은 기와로 바뀌었고 紅桃의 생사, 약천의

돌담, 연못 속의 잉어, 백련사 가는 길에 동백꽃, 차나무는 잘 자라냐 등 다산이 살며 지키던 일을 그 후 누가 하나? 18

인 제자들도 다 죽고 산속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숲이 우거지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산에 흙이 무너져 바위가

굴러 있던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다산초당이 그런 꼴이다.        

 

 

 

 

 

 

2022년 04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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