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만든 사천왕상 약사여래불의 미소
산북면 전두리 공덕산 대승사를 나와 923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김용리 운달산 김용사를 찾아 나섰다.
눈에 빤히 보이는 거리지만 10km, 20여 분 걸렸다.
사람 이름을 차용한 것 같은 동네 이름과 절 이름에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창건 당시 이름은 운달사였는데 문경 부사 김 씨가 산중에 기거하며 열심히 불공을 드려 낳은 아들을 용이라 이름 짓고부터 가문이 번창하여 동네 이름까지 김용동이라 하고 절 이름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運達山金龍寺(紅霞門) 일주문
문경 8경 운달계곡과 나란히 가는 길을 차로 달리다 일주문에서 하마하여 통과 예를 갖춘다.
300년 묵은 전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희끗희끗한 바위와 물소리가 들리지만, 철 지난 계곡은 쓸쓸함만 더 할 뿐 발길을 재촉한다.
금강문
금강문(寶藏門)
문짝에 아, 훔 두 분의 금강역사 그림이 그려졌다. 샷된 무리들로 부터 절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다.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삿된 마음을 다스려 마구니에서 벗어나 일심을 기원한다.
천왕문(사천왕문)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부처님을 비방하고 훼손하는 실제 무리들과 내 마음의 삿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김용사 사천왕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다문천왕(비파, 北)과 지국천왕(검, 東 )
증장천왕(용과 여의주, 南)과 광목천왕(삼지창과 보탑, 西 )
범종각
대웅전 뜰은 통상 누각 아래로 난 계단을 올랐는데 김용사는 음향각과 보제루 사이 계단을 올랐다.
대웅전에는 설선당과 해운당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야간 행사 때 불을 밝히는 노주석 2기와 괘불대가 있다.
석등과 석탑은 어디로 갔나?.
대웅전
김용사는 김천 직지사 말사로 한때 전국의 30 개의 대찰에 속했다.
신라 588년(진평왕 10)에 운달조사가 운달산 정상 가까이 창건하고 운봉사로 하였다가 어느 때인가 현재의 옮겨와 김용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찰이 대부분 그렇듯이 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까지 중건, 중창되다가 조선에 들어와 억불정책, 임진왜란, 일제 침략 등으로 불타고 훼손되었다가 20세기 말부터 점차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게 된 것이다.
대웅전 삼존불상 아미타여래(左) 석가여래(中), 약사여래(右)
대웅전 두꺼비바위
극락전
응진전
금윤전
독성(좌) 금륜보계치성광여래(中) 산신(右)을 모신 전각
명부전
무독귀왕(좌) 지장보살(중) 도명존자(우)를 모신 전각
후원에 소나무가 우거진 나지막한 언덕을 깎아 석조약사여래불 입상을 세웠다.
주변에 돌탑도 쌓고 석불까지 계단도 놓았다. 그냥 지나칠뻔 하다가 올라가 봤다.
약사여래불의 내력이 없다. 민간 신앙이 빗어낸 작품 같다.
시골 아주머니 같은 인상에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다.
삼층석탑
운달산 기슭
우거진 송림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
김용사 전경
1965년 성철 스님이 1년간 머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대부중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첫 설법을 한 성철첫회상지이며 비구, 비구니, 대학불교 신도, 일반 신도들에게 대중법회를 열었다. 특히 대학생 신도들에게 애정을 보낸 것은 인재불사밖에 없다는 소신 때문이었다고 한다.
2020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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