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모신 후 원찰로 승격되다.
집에 애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방학 때 자가용을 끌고 여주 신륵사와 영릉을 방문한 적이 있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 방문한 게 아니고 애들 방학 숙제를 위한 나들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가운데 신륵사 극락보전 주춧돌에 앉아 찍은 사진이 인증처럼 남아 있다.
그동안 산을 다니면서 조선 왕릉도 틈틈이 답사를 하여 이제 몇 곳 안 남았다.
여름 긴 장마 구질구질한 날씨 가운데 산에도 못 가고 집콕하자니 갑갑하여 카메라 달랑 들고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여주 세종의 英陵과 효종의 靈陵 답사 길에 신륵사와 여강길 4 구간을 끼워 일정을 만들어 하루를 여주에서 보내기로 했다.
一柱門 (鳳尾山神勒寺)
일주문이 가까워지니 시야에서 산은 사라지고 강이 흘러든다. 신륵사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구릉지인 봉미산
(156,5m) 자락 남한강변에 자리 잡았다. 일반적으로 절은 산에 있어야 하는 것이 통설인데 강가에 자리 잡은 것이 특
이하다.
쪽 곧은 탐방로가 모래바닥이다. 고수부지에 절을 지어 가로수로 은행나무와 화목으로 해당화 그리고 각종 야생화를
심어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절을 처음 대할 때 절을 보지 말고 부처님을 보지 말고 절을 가꾼 사람들의 마음과 부처님
을 모신 사대부중들의 마음을 보라고 했다. 그래야 진정한 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不二門
두 번째 산문인 금강문과 천왕문이 없다. 불이문이 마지막 관문이다. 이제 불이문을 들어서면 모든 분별이 사라진 부처
님이 앉아 계신 불국정토에 들어서게 된다.
불이문 아, 흠금강역사
신륵사
고려 말기 나옹선사의 입적 후 열반에 들어간 뒤로부터 유명해졌다. 신라 진흥왕 때 원효가 창건하고 이색의 대장경 복
사본을 보관하고 조선 시대 1469년(예종 1) 서울 대모산에 있던 세종대왕의 영릉을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의 원찰로
승격되어 조선 왕조 성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철종 때 왕실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 지금의 골격을 갖추었다.
신륵사 전경이다. 갑자기 구룡루가 흉물에 휩싸였다. 큰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강석 계단과 장애인용인지 자동차용
인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시멘트로 포장한 비스듬한 통로가 나타났다. 현대식 시설물이 천년 고찰을 덮친 격이다.
구룡루(九龍樓)
범종각
극락보전 일원
極樂寶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보물 제1791호)
조선 시대 1610년 (광해군 2) 불아미타여래,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의 목조 삼존불상으로 작가 미상이다.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조선 시대 1472년(성종 3)에 세워진 대리석 불교 탑이다.
명부전 전경
冥府殿
지장보살 (좌)무독귀왕 (우)도명존자 시왕, 판관 29명 존치
지장보살 (좌)무독귀왕 (우)도명존자
奉送閣
49제를 마치고 마지막 떠나는 영령을 전송하는 전각
조사당 전경
祖師堂(보물 제180호)
조선 시대 초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각이다.
조사당은 절에 공적이 있는 승려의 영정을 모신 잔각으로 무학 지공 나옹의 진영을 모셨다.
조사당 향나무(600년) 보호수
원구형석조승탑 (주인 모름)
普濟尊者 부도전 일원
보제존자(1320~1376)는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왕사 칭호가 내려질 때 법호이다. 속명은 아원혜 호는 나옹으로 법명은
혜근이다. 고려 후기 1320년 (충숙왕 7)에 경상북도 영월군 영해면에서 태어나 20 세에 공덕산 묘적암에서 출가하고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했다. 1347년(충목왕 3) 중국 원나라 연경에서 인도 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1358년(공민왕
7) 귀국하여 오대산, 용문산, 금강산 등을 돌아다닌 뒤 양주 회암사 주지가 되었다. 1371년(공민왕 20) 왕사로 봉해진
후 왕명으로 밀양으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보세존자석종 부도(보물 제228호)
고려 말기 1379년(우왕 5)에 세운 것으로 나옹의 사리탑이다.
보세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고려 말기 1379년(우왕 5)에 보세존자석종과 함께 세운 석등이다.
보세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고려 말기 1379년(우왕 5)에 보세존자석종과 함께 세운 碑로 이색이 비문을 짓고 한수가 글을 썼다.
三聖閣
삼성각 (독성 칠성 산신)
大藏閣記碑閣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고려 말기1383년 (우왕 9)에 세운 碑
신륵사 대장각기
대장각은 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이다. 신륵사 대장각이 있던 곳에 세워진 碑로 조성 당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다층전탑(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고려 시대 제작한 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이다. 신륵사는 전탑 때문에 벽절로 부르기도 했고 전탑은 한강
을 오르내리는 뱃사람들에게 등대 노릇도 했다고 한다.
江月軒은 나옹의 당호이다. 맞은편 여주 들판과 남한강을 굽어보는 암반위에 세워져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한때 풍류
를 즐기던 장소이기도 했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봉미산 소나무 숲
남한강 상류
신륵사 은행나무(600년)에 나투하신 관세음보살님
상수리나무(600년) 보호수
신륵사 전경
신륵사 경내에 향나무, 은행나무, 상수리나무(참나무) 노거수 3 그루가 있는데 하나같이 수령이 600 년이다. 나옹선사
의 연대와 맞춘 것인지 아리송하다.
기와불사 접수처
普濟樓
불이문
템플스테이
일주문을 나서면서도 별다른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무식이 유식했기 때문일까? 하늘도 흐리고
강물도 혼탁하고 바람도 없는 찌는 듯한 후덥지근한 날씨에 그늘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어디로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
었다. 박물관, 도서관, 도자기 체험장, 캠핑장과 같이 어울려 관광지가 되어버린 신륵사는 더 이상 고풍을 되찾기는 힘
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고층 아파트의 허가로 반사적인 지방세수의 증가, 졸부가 돈 쓸 곳이
없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둥대는 꼴이다.
2021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