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소문따라/아산 현충사

충남 아산시 현충사

안태수 2019. 12. 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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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란 후손 잘 둔 德으로 유허지를 최고의 유적지로 

 

예산에서 아산까지 약 30km 점심시간 빼고 약 40분이 걸려 도착했다. 도로변으로 집들이 이어졌다. 예산, 신예원, 도고, 아산 이제 마을의 경계도 사라졌다. 도시에 산다고 뽐내던 시대는 지나갔다. 거대한 도시의 출현이다. 해가 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시각 현충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노란 은행니무, 사람들, 자동차 사이로 역광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게 보인다. 

  

주차장 도착

현충사 중건을 마친 1970년 어느해 여름으로 기억한다. 시멘트를 들어부어 주차장, 담장, 산책로, 참배로, 현충사를 완공했다. 천지가 회색이었고 앙상한 묘목에 건물의 파란색 지붕만 기억에 남아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현충사도 많이 달라졌겠지 하는 기대감에 예산, 아산 산행 일정에 답사를 포함시켰다.

   

 

주차장 은행나무

현충사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방화산(167.6m) 기슭에 자리 잡았다. 산이 그리 높지도 않아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형세이다. 명당자리이다. 주산과 좌 청룡 우백호는 높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형에 어울야 한다. 주산인 물한산(284m)에 좌,우로 금병산과 방화산이 둘러싸고 전면 예산 들에 곡교천이 흐르고 먼 도고산이 버티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땅이다.

   

 

현충사 정문

입장료가 없다. 옛날에는 공공 관람물에 입장료를 다믄 얼마라도 받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 다양한 공짜가 생기는 것을 보고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공짜는 비천하게 취급당하는 경향이 있어 명품을 만들려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게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놀러오는 사람 없다. 리무진 관광버스와 자가용 타고 온다. 세금을 덜 걷고 입장료를 받아라. 

 

  

울창한 외곽 경계 수목

 

 

입구에 들어서면 잔디를 입힌 고분처럼 생긴 것이 앞을 가로막는데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이라고 한다. 현충사 전면을 가려 좋은 전망을 망치는 것 같다. 기념관에는 시대의 유물이 담기는데 건축물도 시대에 따랐으면 하바램이다. 제주도 대정 추사 기념관 같은 것은 저기가 뭐하는 곳인지 야외 전시물 보는 듯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전시동 교육동 사무동으로 나누어져 있고 연면적 3104㎡(939평)에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이다.

 

 

전시관 입구

 

 

충무공 이순신 영정

 

 

오로지 유물에만 관심이 가지 후세들의 창작에는 관심이 없다. 역사를 조명하는 일에 나름의 관점이 생겨 마구잡이 주입식에는 거부감을 느껴 차라리 외면한다.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전투 대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인데 얼마나 현실에 접근햇는지 상상에 맡긴다. 국가에서 지정한 국보와 보물급에만 집중하고 지방 문화재는 다음 세가 감탄하도록 평가를 유보한다. 기념관에 전시물 중 일부를 소개하면    

*난중일기, 임진장초, 서간첩(국보 제76호, 세계기록유산)

*무과급제교지(보물 제1564-7호), 선무공신교서(보물 제1564-1호), 충무공증시교지(보물 제1564-12호),

*충무공 장검, 요대, 도배, 옥로 (보물 제326호),

 

 

충무문

 

 

충무문

 

 

능소화

    

 

반송

 

 

연못가 느티나무 보호수

 

 

인공 연못 석조교

 

 

정려(旌閭)

조선시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내린 현판을 마을에 걸어둔 정각을 말하는데 이 정려에는 충무공 이순신 외 4분의 현판이 걸려 있다.

 

 

단풍나무

 

 

참배로

 

 

홍살문

 

 

충의문

 

 

현충사

충무문, 충의문, 현충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 친필이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논란에 휩싸인 현충사 현판이다. 1707년 숙종이 사액으로 내린 현판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의 찬, 반 논쟁에 문화재청이 둘 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그냥 두기로 결론을 내렸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바뀌고 변한다. 그 역사 속에 숨쉬고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는 잊지말아야 한다. 역사를 그대로 두라.

       

 

참배

 

 

충무공 이순신(1545, 4, 28~1598, 12,16)은 1545년(인종 1)에 음서(陰敍)로 무과 관직에 오른 이정(李貞)과 卞氏의 셋째 아들로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관직에서 물러나 어린 시절을 빈곤하게 보내다가 소년기외가인 충청도 아산에서 지냈다. 1565년 21세에 方氏와 결혼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으로부터 과를 배우며 무과에 지원하여 1576년(선조 9년)에 나이 32세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선다.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수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임진왜란이 발발해 옥포해전 ,서천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해전, 응포해전, 천량해전,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면서 노량해전에서 1958년 12월 16일 54세의 일기로 전사했다. '내 죽음을 알리자 말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현충사 전경

 

 

구현충사

*1706년(숙종 32) 아산 유생들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건립

*1707년(숙종 33) 숙종이 현충사란 사액 현판(숙종의 글씨)을 내리다.

*1868년(종 5) 사원 철페령으로 폐쇄.

*1932년 일제강점기 현충사 중건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사업 추진

*2011년 현충사 종합정비계획 실시

 

 

아름다운 동산

 


충무공 고택

이순신이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 상주方氏와 21세에 결혼하여 32세 무과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집

 

 

고택 내부

 

 

고택 후원

 

 

고택 전경

 

 

충무공 후손 묘

 

 

충무공 세째아들 이면의 묘

 

 

충무공 장인 장모의 묘

 

 

활터 은행나무

 

 

 

활터 과녁

 

 

인공 연못 주변 단풍

 

 

잉어

 

 

관람을 마치고 정문을 나서다

 

 

현충사 주차장

현충사 경내가 참 잘 가꾸어져 있다 조성한 지 50년이 넘었으니깐 여러 나무와 갖은 화초가 잘 자라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정원을 이룬다. 조선 왕릉을 비롯한 나라안 국가가 관리하는 추모지 중에 이보다 더 넓고 크고 장엄하게 꾸며진 곳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구 현충사는 문이 닫혔고 이충무공 묘소는 12월 31일까지 정비공사 중이라 관람을 일시 중단하고 있다.

 

 

 

 

 

 

 

 

 

                                                     2019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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