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초파일만 山門을 여는 희양산 봉암사
희양산 봉암사는 일 년에 한번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에만 절을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불자도 아닌 나까지 덩달
아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한 번씩 다녀온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한 것처럼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가은 읍내
에서부터 상괴교 삼거리까지 약 4km는 1차선만 남겨 놓고 주차장이 되고 사찰 경내와 주변 마을은 사람들로 들
끓는다.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불자들은 다 모여드니 가은은 터져나간다. 풍문에 겁을 집어먹고 새벽 4시에 서울
을 떠났다. 한산한 고속도로를 달려 문경을 빠져나와 가은으로 달린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차들이 줄을 잇기 시작
한다. 학교(임시주차장) 건물이 보이고 경찰과 행사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교정에 무사히 주차한다.
(06:30)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장
가은읍 상괴1리 양산천 상괴교 삼거리
희양산(曦陽山 999m)
불상보다 더 잘 생긴 산, 저 산을 버스 안에 갇혀 지나치다니 부처님 거쳐 하는 수미산은 안 보고 부처님만 보고
나오는구나. 백두대간을 걸으면서 괴산 연풍면 악휘봉삼거리 지나 이름 없는 암봉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희양산
모습 흰 바위봉우리가 산등선 전체를 덮고 있는 광경은 말로만 듣던 미국의 요세미티 하프돔이 부럽지 않은 장관
이었다. 화강석 돌덩어리에 압도당하여 얼마나 걸음이 더뎠는지 나를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했다. 언제 한 번만이
라도 산 아래에서 위로 쳐다볼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봉암사 문을 여는 날 찾게 된 것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
았다.
셔틀버스
절까지 약 4km 처음부터 걷기로 작정하고 왔다. 나 빼고 전부 버스 타려고 임시 정류장에 길게 줄을 선다. 셔틀버
스는 절에서 무료로 운행하며 별도 운행시간표는 없고 만차가 되면 바로 출발한다. 걸어서 4~50분 거리를 버스
로 10분이면 당도하니 요즘 사람들의 웰빙 구호는 입에 발린 소리밖에 안 들린다.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입구 마을 장사 나온 사람들도 한 몫 한다.
초파일 행사 차량
희양산과 구왕봉(九旺峯 879m)
대구 아줌마한테 "저 산 이름 암니까.?" "모름니더" "그럼 옆에 산은 더 모르겠네예" "예" 산은 관심 없고 오로지
부처님만 중한 모양이다. "저 산이 없으면 절도 없심데이" "그러니깐 저 산 보고 먼저 절하고 그래 가이소" "잘 생
겼잖아예" 연신 허리를 굽히며 절을 한다.
(07:20) 희양산봉암사 일주문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봉암사 측의 참배객에 대한 협조 사항을 되새겨 본다.
1. 당일 오전 7시부터 17시까지 10시간 개방.
2. 경내 법당만 허용하고 산지 암자나 스님들의 수행처는 불허
3. 등산복, 반바지, 민소매, 화려한 복장은 출입금지 조치
4. 절을 통과하는 희양산 등산로는 경찰과 합동 단속한다.
희양산봉암사曦陽山鳳巖寺 일주문 현판
양산천 침류교
남훈루南薰樓
구왕봉을 배경으로 하는 전각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 석가모니불(중앙) 보현보살(우) 문수보살(좌)
흰색 연등 달기
봉암사는 성철스님과도 인연이 있는 절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걸으며 스님들은 천민의 대접을 받으며 조정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소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절은 조정의 눈치를 봐야 하며 한편으로는 신도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강한 신도들에겐 아부하는 현상까지 벌어
지는 추태가 발생한 것이다. 절의 주인이 바뀐 시절이 한동안 지속하면서 성철스님을 중심으로 한국 불교의 구명
운동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영향으로 참배객들은 흰색 연등을 숫자와 관계없이 돈 한 푼 안 주고 단다.
대웅보전 우측 마당
주지실(좌)과 금색전
주지실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주요 전각들
대웅보전
극락전極樂殿(아미타불)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제1574호)
조선시대 불교유물 불전
산신각山神閣
지증대사 비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
통일신라 시대 비碑
최치원이 비문 작성하고 지증대사의 불적을 구체적으로 기술되었으며 비문을 쓰고 각자 한 사람의 이름(분황사
혜강)까지 밝혀져 제작 시기가 고증되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보물 제137호)
통일신라 시대 불교유물 탑
조사전
조사전에는 종파(구산선문)의 시조를 연 스님, 창건 스님, 중창 스님 등 사찰의 융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 스님들
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간으로서 스님의 영정을 모신 전각이다.
솟을문(모유문) 수행 공간
금색전 대웅전 현판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통일신라 시대 불교유물 탑
금색전金色殿
금색전 비로자나불
금색전 동종과 삼층석탑 상륜부
범종각
희양산과 구왕봉이 잘 보이는 곳
다행히 사람들과 부대기지 않고 절 구경을 잘 마치고 계곡에 있는 백운대 마애보살상을 참배하러 간다.
(08:00) 마애불 참배길
이끼가 잔뜩 낀 바위
대구 아줌마
나처럼 새벽 4시에 대구를 출발하여 6시 조금 넘어 가은초등학교 희양분교에 도착 차를 주차시키고 절까지 4km
걷다가 도중에 나를 만나 같이 걷는다. 나이 들어 생각한 게 죽기 전에 전국 절이나 한번 찾아보자며 시간 나는대
로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같은 동향이고 년배도 비슷한 거 같고 서스럼없이 말을 받아 주니 금방 친구 된다.
산작약
백운대
스님들의 야외 도량 100여 평의 마당바위
봉암사도 6. 25전쟁을 겪으며 봉암사 결사도 무너지고 절도 다 타버렸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을 뜻있는 스님
들의 노력으로 중창을 맞게 된다. 1982년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며 산문이 폐쇄되고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이어 희양산 일대가 산림청으로부터 산림유전자원 보호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희양산은 산문의 관리에
들어가며 불판을 든 행락객들의 무질서한 경내 여가 활동이 사라졌다.
마애보살좌상
맑은 물소리
백운대 돌아 나오는 길은 오솔길, 사색길, 수행길, 참선길, 참회길, 다시 못 올 길이다.
요즘 개도 사색을 하는 데 나 같은 사람은 뭘 할 줄 아는 게 없다. 저 문을 나서면 마지막이란 생각만 난다.
탐방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대구 아줌마와 작별을 한다. 나는 다음 일정이 있으니 먼저 가기로 하고 대구 아줌마는 넉넉히 있다가 나
오기로 한다.
(08:50) 답사를 마치고 일주문을 나선다.
봉황문鳳凰門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국사에 의해 창건되고 고려 초 긍양 스님에 의해 재창건 하면서 구산선문
의 희양산파 중심 사찰이 된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태조 18년 정진 대사가 중창하고 조선에서는 세종 13년 기
화가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신화 스님이 재건했다. 6.25 전쟁으로 황폐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
은 서암 스님의 원력이 크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요사채가 있다. 안내문에 있는 내용을 받아 적
어 본다.
2016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