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히 알면서 자빠지고, 구르고, 쓰러지는 눈 산행
아이젠을 겨우내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전 주 강촌리 검봉산 등산 갔다가 눈이 말끔히 녹은 것을 보고 배낭에서
빼버렸다. 후회가 막심하다. 등산 시작부터 낙엽과 눈 녹은 물이 섞인 겉으로 보기에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
을 느끼게 했지만 실제는 비수를 감춘 악마였다. 뒤로 발랑 자빠지고, 앞으로 구르고, 옆으로 쓰러지고 빤히 알
면서 대처를 해도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고양산, 아미산 모형도
(09:50) 강원 홍천군 서석면 풍암2리 고양산 아람마을
갔던 산을 두 번 다시 가지 않고 지나간 등산로를 뒤돌아오지 않는다. 산은 가야 할 산이 많이 남았고 되돌아오
는 산길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포기 행위이다. 그래서 가는 길 생소하고 오르는 산마다 초등이다. 만약 내비게
이션이 없었더라면 돌아다닐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을 거다.
고양산 전경
풍암1리까지 잘 왔다. 산은 바로 앞에 보이는데 마을 입구에 등산 안내도나 이정표 같은 표시물이 없어 동네 사
람을 찾아 나섰다. 가게, 마을회관은 문이 잠겼고 비닐하우스에서 작업하는 농부를 발견했다. 고양산 올랐다가
아미산으로 내려온다니깐 "검산1리에서 여기까지 약 5km 어떻게 오실 건데요?" "걸어서요" 어처구니없다
는 듯 포장도로 따라 끝까지 가면 산 밑이고 이정표가 있다고 한다.
풍암2리 아람마을 전경
장막 고양산(1.5km) 발치 빈집에 차를 대고
산 자락 마을 이름이 장막이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가건물이 있다. 마침 아랫집 할아버지가 빈 집이니깐
차를 대도 괜찮다고 한다. 역시 고양산 갔다가 아미산 거처 차를 회수하러 되돌아온다니깐 굉장히 먼데 잘 다녀
오라고 한다. 요즘 시골도 집집마다 차가 있고 할머니도 운전하는 세상이니 도로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다.
고양산 정상 모습
소나무가 주요 수림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온 모양이다. 요즘 산에 나무 베는 장면(간벌)은 자주 목
격되어도 심는 꼴은 안 보인다. 숲 사이 푹신한 소나무 낙엽을 밟으며 한 동안 호젓하게 산속으로 들어간다.
나무(침목) 계단도 반듯하게 놓이고
산 모룽이를 돌아 비탈길이 끝나면
다시 고개를 처박고 가쁜 숨을 쉬며 낙엽송 낙엽이 붉게 진 산등성이를 오른다.
이번에는 소나무가 반긴다. 소나무 잎도 역시 땅바닥에 뒹굴면 낙엽송처럼 붉은색을 띤다.
작은 너덜, 잘게 부서진 바위들, 사면을 흘러내려가다 완만한 경사에 잠시 멈쳤다.
나무 가지 사이로 산마루가 희끗 보인다. 지금까지 힘든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저곳에 닿으면 능선이 시
작 되고 전망도 보며 하늘도 나타나고 쉼터도 있어 쉬엄쉬엄 갈 수 있다.
산마루 의자가 놓여 쉼터에 무궁화나무가 있는 샘터 갈림길이 있다. 샘터가 있는 계곡까지 내려가는데 0.4km
물도 충분하고 무궁화나무는 아직 싹도 내지 않은 벌거숭이 상태일 것이고 거기다가 길도 미끄러워 두 번 생각
할 것 없이 패스한다.
너설로 채워진 뾰족한 마루금이다. 경사가 급한 쪽으로 안전 로프가 메여있다. 바닥에 돌을 단디 밟으면 슬립을
예방할 수 있다.
바위에 스탠스 설치
사거리 안부
좌, 우는 샘터(무궁화나무)와 또 다른 풍암리 장막 가는 길이고 직진 오르막 끝이 고양산 정상이다.
바위 사이를 뚫고 길을 내다.
고양산 도착
(11:15) 고양산(高陽山 672m) 정상석과 기념촬영
멀리 있는 산들은 가스와 역광 때문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산 그리매를 드리운다. 북녘은 설악이고 동쪽은 평
창 오대산, 계방산, 남쪽은 치악산, 백덕산, 서쪽은 같은 군의 공작산이 있다. 사이사이에 방태산, 가리왕산과
가리산, 사명산이 자리 잡고 있다. 눈 닦고 봐도 그 산이 그 산이다.
풍암2리 마을 전망
정상에 있는 고양산 아미산 등산 안내도
길은 외길 눈 덮인 하얀 산길이다. 등산로가 북사면으로 치우쳐 어둡고 바람도 마주 불어 으스스하다. 아미산 정
상까지 3.3km 삼형제봉을 위시하여 여러 차례 봉우리를 넘나들어야 한다. 오르막은 그런데로 달라붙을 수 있지
만 내리막은 정말로 위험하다. 삐끗했다간 천 길 낭떠러지 계곡에 처박힐 것이다.
650봉 안부 삼거리(장막, 444번 지방도)
덕밭재 갈림길
어디 붙잡을 때도 없고 스틱도 믿지 못하고 아이젠도 안 신고 등산화도 오래되어 요철이 다 달아 걱정이 태산이
다. 엉덩이를 바닥에 된 앉은뱅이 자세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과연 뒷모습은 어떨까? 그루터기에 카메라 올려놓고...
발목이 빠질 정도로 눈이 쌓였다. 눈이 얼었다면 큰 문제가 없는데 녹는 중이라 잘 미끄러진다. 아이젠으로 빙벽
오르듯이 퀵스탭으로 발이 단단하게 박힌 것을 확인하며 진행한다.
'요산의 하루'
하얀 눈 위에 사람 발자국이 나타났다. 그런데 내려오다가 돌아간 발자국이다. 아마 위험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도 반갑다. 동행이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발자국 위를 따라 밟으며 아미산 정상 그리고 하산까지 이어지기
를 기대한다.
844,4봉 통과
아미산 0,95km 남은 지점
안부이고 삼형제봉 시작이며 앞선 발자국이 검산1리로 사라진다.
(14:09) 삼형제봉(3)
(14:14)삼형제봉(2)
(14:40) 삼형제봉(1)
(14:45) 삼형제 마지막 봉우리를 로프를 잡고 내려섰다.
(15:05) 위험지역 우회
바위를 등지고 점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늘 갖고 다니는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수프, 2+1 행사할 때 많이 사두
고 찹쌀떡은 산행용으로 아예 한 박스씩 사다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가 나올 때 하나씩 가지고 나온면 점심때쯤
기가 막히게 녹아 있다. 과일은 바나나, 사과 중심으로 당일 집에 돌아다니는 것을 넣어 오고 음료수는 차 종류
로 수시로 끓여 마시다가 남은 것을 500ml 패드병에 담았다가 들고 나온다. 주전부리용으로는 망사 주머니에
오만 과자를 다 집어넣어 선물세트 같다.
(15:10)아미산(娥眉山 958m) 도착 정상석과 기념촬영
강원도 오지에 있는 산이라 차를 안 가지고 가면 당일로 돌아오기 힘든 곳이다. 가파르게 솟은 산이라 한눈에
바위산임을 알아봤다. 아직도 새하얀 눈길 아이젠을 두고 왔다. 비탈길은 잔도처럼 아슬아슬하고 바위길은 눈
이 얼어붙어 발 디딜 곳을 찾느라 애를 먹었고 암벽 오르기는 눈이 없어도 공포감을 자아냈다. 진퇴양난이다.
탈출로도 한 번도 가지 않는 길이라 선 듯 정할 수도 없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구르는 위험한 산행이
었다. 덕분에 트랭글 gps에서 인정하는 올해 고양산 첫 등정자로 인정받아 배지의 주인이 되었다.
검산1리 이정표
산행거리를 늘이기 위해 당초 검산2리 방향으로 하산할 작정이었으나 눈길이 감당이 안 돼 남쪽 가지능선을 타
고 하산하기로 한다.
눈이 많이 녹아 있다. 낙엽 아래 얼은 땅만 조심하면 된다. 스틱을 쥐은 손과 다리에 온 힘을 가해 미끄럼을 방지
하고 경사가 심하면 스틱으로 낙엽을 걷어내고 맨땅을 확인하는 절차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무만 봐서 철쭉인지 진달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째튼 꽃이 필무렵 무리지어 피는 모습이 장관일 것 같은
예감이다.
이 산은 소나무가 많고
낙엽송도 많이 심었다. 소나무와 낙엽송 사이 피톤치드가 가득한 등산로를 걷는 기분은 피로를 잊게 해 준다.
심은 지 그리 멀지 않은 어린 소나무들 우리 나이나 되어 보인다.
(16:25) 산을 다 내려왔다. 위험한 고비도 다 넘겼다. 계곡을 끼고 폐가도 보이고 아미산 이정표도 서 있다. 화
살 표시 두 개가 다 아미산을 가리킨다. 능선에서 사라진 발자국은 건너편 계곡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목적지
검산1리 56번 국도까지는 2,44km 남았다.
계곡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임도를 만난다.
이내 시멘트 포장도로와 접속하여 하산을 계속한다.
계곡 양지바른 빈터에 갈대인지 억새인지 물가에 자라는 것을 보면 갈대인데 꽃이 잘 생긴 것을 보면 억새가 틀
림없다.
검산마루
밤나무골 통과
(16:55) 검산1리 도착
택시, 버스, 히치하이킹 어느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풍암2리 장막 차를 세워둔 곳까지 56번 국도를 약 5km 걸
어간다. 풍암1리, 서석면사무소, 444번 지방도 갈림길, 풍암2리, 장막까지 길거리 노인들 한데 길 물으면 잘 가
리켜준다. 대신 서로 귀가 어두워 소리쳐야 한다.
아미산 연봉
고양산 능선
(18:05) 장막 도착
차를 회수하여 아침에 길 가리켜 준 할아버지한테 인사하려고 기웃거려봐도 인기척이 없어 그냥 돌아섰다. 얼
마나 힘든 산행이었는지 몸살과 다리 어깨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다. 차를 타려고 의자에 궁둥이를 얹을 때, 다
리를 올려놓을 때, 기지개를 켤 때, 뼈 마디마디가 결린다. 이 정도면 목욕으로 해결되지 않고 며칠 가야 한다.
56번 국도를 따라 홍천으로 들어오다가 좌측으로 난 공작산 팻말을 지나 동홍천 IC에서 서울 양양간 고속도로
를 탔다. 하루 종일 재대로 된 식사를 못해 가평 휴게소에 들러 기소야 우동으로 저녁을 먹고 밤 9시경 집에 도
착했다. 끔찍한 하루였다.
2019년 3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