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짓눈개비, 눈속에서 대간 길(여원재~복성이재) 걷다
용산역에서 여수까지 가는 밤10시45분 무궁화열차는 이제 친근한 열차가 되었다. 앞으로 몇번 더 이용해
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리산, 덕유산 산행에는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새벽 2시30분 남원역에서 내린다.
새벽부터 개일거라는 일기예보는 아직도 안 맞다. 가랑비가 제법 굵어 금새 옷이 젖을 것만 같아 대합실에
혼자 남는다. 베낭을 짊어지고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은 총총 걸음으로 택시를 타고 사라진
다. 도착시간에 맞혀 대기하던 택시들도 사람이 다 내린 것을 확인하고는 시내쪽으로 사라진다. 잠시 미아
가 된 기분이다. 동이 틀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보낼까 역구내를 어슬렁거리며 궁리하다던 중 혹시나
손님 있나 하고 역으로 들어온 택시를 만나 24시간 찜질방(녹수장)까지 태워달라고 한다. 사우나만 이용
하는 조건으로 요금을 내고 들어가니 탕엔 물이 비워있고 샤워만 가능하다.
대간길을 앞에 두고 진을 빼서도 긴장을 풀어서도 안된다 적당히 긴장하면서 약간의 가벼움을 느껴야 산
을 가볍게 오를 수 있다. 다음은 아침과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택시기사에게 물어 논 콩나물해장국집을 찾
아간다. 비는 계속해서 같은 양으로 내린다.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지만 오늘은 아침을 먹고 점심을 간다히 먹기로 한다, 추운 산길에서 적당히 먹을만
한 매뉴도 없고 시간도 부족할 것 같아 24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롤김밥 각 하나씩 준비하고 식당에선 커
피용 뜨거운 물을 얻는다. 시내버스는 새벽 6시30분 부터 운행하는데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택시를 타기
로 한다.
여원재(남원시 운봉읍)
택시를 타고(12,000원)남원~함양간 24번 국도가 지나는 여원재(운성대장군)에서 내린다.(06:30)
길에는 가랑비, 산에는 짓눈개비가 하얗게 쌓인다. 일기예보는 아침부터 맑아질거라고 했는데...
믿고 산행을 결심한다. 해드램프 착용하고 주위를 비추니 얼마전에 본 풍경이 눈익게 들어온다.
백두대간 표식기(리본)를 열심히 쫒아 갈 작정이다.
대간길도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도에 따라 사정이 제각각이다. 대간 전체길을 통괄하는 조직이 생겨 코스
정비,안내판설치, 대피소설치, 탈출로확보, 홍보, 순찰활동, 등 시스템을 갖춘다면 외국의 유명한 트레일
처럼 훌륭한 트레일이 될것으로 생각든다. 지금 올렛길들은 한창 개발되고 있는데 더하여 백두대간길도
하루속히 정비되기를 기대해 본다.
첫번째 만나는 이정표 짓눈개비가 쌓여있다.
비가 짓눈개비로 바뀌고 눈으로 바뀌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정표를 따라 동네(장동마을)로 들어간다.
간간이 가로등이 켜 있고 집들은 아직 한 밤중이다. 개 짓는 소리에 잠을 깨우는 것 같아 미안하다.
동네가 끝날때까지 리본(표식기)은 나타나지 않아 산 밑까지 뒤져봤지만 헛수고다. 마침 노인 한분이 새벽
마실 나온다. 꼭두새벽에 고남산 가는 길을 물어오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길을 가르쳐주는데 지리산
사투리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대충 눈치로 감을 잡고 가르키는 방향으로 가보니 리본이 안나타난다.
길이 어긋난 지점으로 돌아오는데 마을 입구 추녀 밑에 한 묶음 메달려있는 리본을 발견한다.
낮이면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을 어두움 때문에 놓친 것이다.
20분 정도 헤멨나!
동네 뒷산으로 난 대간 길 따라 잡목과 벌목으로 쓰러진 나무사이를 이리저리 패해 능선에 도착하니 소나
무숲 사이로 사방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고남산까지 흙길은 녹은 눈 때문에 질퍽거린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봉우리가 고남산인가 해서 계속 지켜보고 왔는데 가까이 오니 왼쪽으로 갈라진 능선
상에 있다.
고남산은 계속 직진으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바위 사이로 난 철제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바로 정상이고 온통 바위 투성이다.
산불감시초소와 철탑(통신기지국)이 정상에 있고 정상석은 바로 아래 넓은 공터에 있다.(09:00)
고남산(846.4m)
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 경계에 우뚝솟은 봉우리 정상엔 산불감시초소와 무선기지국, 헬기장이 있다.
운봉과 서로 마주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산.
하늘은 잔뜩 흐려 세상을 잿빛으로 물들인다. 눈이 발목까지 찬다. 나무도 눈을 흠뻑 뒤집어 쓴다. 바람에
이리저리 뿌려지는 눈은 시야까지 가로 막는다.
정상 바로 아래 임도에 세워진 백두대간 안내도 주변으로 이정표가 없다. 임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리본을
열심히 찾는다. 우측 산으로 향해 메달린 리본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생각없이 쫒아 간다. 또 임도가
나타난다. 안내도가 있던 지점에서 약간 위쪽이다. 길 끝이 보이고 철책 담장에 초소와 문이 있는 것을
보면 군사지역처럼 보이고 또 막다른 길이다. 다시 안내도가 있던 지점을 확인하고 방금 왔던 길로 되돌아
가서 지도를 꺼내 살펴본다.
임도길, 지름길이 있으며 길 가장자리에 고목나무가 있고 통안재라 표시되어 있다. 고목나무 뒤로 리본이
보인다. 왔다갔다 허비한 시간이 30분 억울한 생각이 든다.
통안재
마을을 가까이 보면서 걷는다.
우측으로 저수지도 보이고
유치재라고 쓰고 해발 573.2m봉을 표시한 사재 안내판도 만나고
백두대간 리본들!
어디가 유치재인지 사재표시기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조금 전 573.2m봉과 이곳에도 사치재라고 표시하니
남원시에서 확실하게 정리해주길 바란다.
「청미래덩굴」
충청도에서는 '멍개' 경상도에서는 '망개'라고도 한답니다.
매요마을 입구
매요휴계소(매점)
버스정유소에서 동네 할머니 두분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나도 비에 젖은 베낭을 정리한다. 매점
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주인은 남원 병원으로 진찰 받으러 가고 지금은 아마 없을 껄 한다. 간단한 점심
이나 따뜻한 국물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틀려버렸다.
지금까지 가는 비를 계속 맞고 와서 베낭도 옷도 많이 젖었다. 또 등산화 안까지 젖어 걷기가 무척 힘든상
태다. 우산을 쓰기로 한다.(11:30)
매요교회
동네 규모에 비해서 교회가 크다. 시골에는 사람이 준다고 하는데 교회만 덩그러니하니 매요마을 하면
교회가 생각나겠다.
사치마을 입구 표시
유치삼거리(유치재)
미리 말하면 사치재를 지나 88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지하통로는 막혀있다. 불법으로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유치삼거리에서 차도를 따라 사치마을 방향으로 약 1km 가면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유정육교가 나오는데
대간길을 옮긴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 나처럼 고속도로 무단횡단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길바닥에 누운 이정표 사치재(500m)에서 복성이재까지 7.2km
사치재 88고속도로 확장공사구간은 기존 고속도로 두배로 확장하면서 작업공간까지 합쳐 산 절개 구간이
고속도로 3배의 폭으로 넓어졌다. 옛날에는 지하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바로 횡단했다는 무용담을 인터넷
에서 봤는데 지금은 절개지가 절벽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절개지를 따라 가시덩쿨을 헤치며 지하통로까지
왔다.
사치재 88고속도로 지하통로 끝은 콘크리트로 막혀 있다. 인터넷에서 대간 종주하는 사람들이 지하통로를
지나다니는 그림을 보았는데 황당하다.
별 도리 없이 사치재 88고속도로구간을 무단 횡단 하기로 한다. 공사차량이 지나다니는 길로 도로면까지
올라와서 양 방향으로 차가 안보일때 잽싸게 건넜다. 갓길에 서서 숨을 돌리는 순간 반대편 차선으로 고속
도로 순찰차가 나타난다. 희한한 일이다. 어디선가 지켜보다가 달려온 것 같다.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먼저 갓길에서 빨리 물러나라고 한다. 나는 백두대간 종주중이며 사치재에서 길을
잃었고 다른 횡단 방법을 몰라 헤매다가 불법을 저질렀다며 몇번이나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경찰은 당신을 어떻게든 처벌해야하는데 방법이 없다면서 조심해서 가라한다.
시리봉 방향 대간 길
걸음아 날 살려라 단숨에 한봉우리까지 올라왔다.
비도 끄치고 구름사이로 햇빛도 난다. 대신 강풍이 불어 구름을 마음대로 몰고 다닌다. 사방으로 시야도 맑다.
지리산 덕유산이 앞 뒤로 있고 한 곳에서 두 산을 동시에 보니 기가 막힌다. 여기가 명당이다.
늦은 점심은 삼각김밥. 롤김밥, 따근한 커피 한잔이다.(13:30)
지리산 방향
88고속도로 지리산휴계소와 인월방면
새맥이재(14:40) 통과
시리봉 통과(15:30)
덕유산(남덕유산) 방향
모처첨 바위덩어리 하나 만났는데 그것도 남근석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生殖이 안되는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 열심히 기도하면 기도빨 서겠다.
남근석 뒤로 시리봉 조망
복성이재도 보이고 봉화산도 보인다.
사람 키보다 큰 철쭉과 가시나무들이 좁은 등산로에 서로 엉켜 있어 모자나 베낭을 붙잡고 걸음을 성가
시게 한다.
阿幕城(아막성)
삼국시대의 石城으로 신라와 백제가 영토 전쟁을 하면서 쌓은 城
복성이재 1.2km, 흥부묘 0.7km, 야막성 0.2km
야트막한 산길을 붙들고 계속 고도를 낮춰니 포장된 임도가 나타난다. 드디어 복성이재에 도착했다.
베낭을 벗어 놓고 그동안 쌓인 피로와 긴장을 풀기 위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간길을 학실하게 안내해준「동희」백두대간종주팀의 표식기(리본)에 감사한다.
이정표엔 인월 콜택시스티커가 붙어있다. 이제 복성이재까지 다 온줄 안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고 싶어
콜택시를 부르니 인월서 출발하고 약 15분 걸리며 요금은 12,000원 정도, 지금 위치를 설명하니 곧장 오겠
다고 한다. 한참 후 기사한데 걸려온 전화는 751번 국도상에 있는 복성이재에서다. 곧 내위치를 알고 꼼짝
말라고 한다. 그러니 뒤에 있는 언덕을 넘어야 복성이재다.(17:00)
당초 3박4일 예정으로 육십령까지 목표로 준비하고 왔는데 예상치 못한 눈과 등산화 누수 때문에 일정을
포기 한다. 남원까지 택시비는 35,000원, 꼼짝도 하기 싫어 남원 추어탕 잘 하는 집까지 태워달라고 한다.
추어탕으로 저녁 먹고, 휴지로 신발 안 쪽 습기 훔쳐내고, 맨발로 신을 신고 남원역으로 와서 저녁 7시
45분 ktx를 탄다. 눈을 뜨니 서울 가까이다.
2012년 11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