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양주 온릉 답사
조선왕과 왕후가 17 곳에 40기가 있다
김포 장릉 답사를 마치고 내친김에 김포에서 약 35km 떨어진 양주 온릉 답사를 위해 김포대로를 달리다가 김포 IC에서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를 올라타서 송주 IC에서 빠져나와 장흥 방면으로 약 3km 달리다 보니 우측으로 온릉 지주간판이 나타났다. 주차장 입구가 협소하여 지나쳐 U턴 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관람객이라곤 나 혼자 밖에 없어 조용하기보다 차라리 썰렁했다.
온릉 주차장(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255-41)
세계유산, 국가사적, 안내도
온릉 출입구
유공자 신분증을 제시하니 관계없이 언제나 무료라고 한다. 다른 왕릉은 입장료를 다 받는데 그렇다고 입장료 안 받는 이유까지 꼬치꼬치 물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사보호 지역에 속해 비개방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탐방로
팸플렛을 챙겨 호젓한 탐방로를 따라 들어간다.
재실 전경이다.
달랑 재실 한 棟에서 제향을 다 감당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산수유가 지켜주니 쓸쓸하지는 않겠다.
재실 입구 엄나무 귀신은커녕 쫓아낼 사람도 없다.
엄나무 가시
온릉 전경이다. 뒷산이 일영봉이다.
정자각
홍살문
향로와 어로
배위(판위)제향 때 임금이 대기하는 자리
정자각은 정청 정면 3칸 측면 2칸,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 건물로 조선왕릉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정자각이다.
정자각 정청
정자각 배위청과 정청
정자각 신계와 어계
정자각 정면
예감(망료위)은 제향후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산신석은 능이 있는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능침
온릉
추존 왕비의 능이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 그리고 무석인을 생략한 것이 특징이다.
온릉 전경
산책로를 따라 오르다가 언덕배기에 서면 온릉의 전경이 바라 보인다. 능침의 구조와 석물도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무례하게 능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서도 답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비각
신도비(朝鮮國 端敬王后 溫陵)
온릉은 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부인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신 씨의 능이다. 신 씨는 연산군의 처남인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로 진성대군(중종)과 혼인하여 부부인이 되었다. 진성대군이 1506년 증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신수근이 증종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역적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딸은 7일간 중전에 머물다가 중종반정 공시들에 의해 강제 이혼당하여 페비가 되어 본가로 돌아가 독수공방 하며 살다가 1557년(명종 12)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과 사후에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200년 후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양주 장릉에 있던 묘를 온릉으로 승격하여 왕지의 격식에 맞추어 다시 조성하였다.
수복방터
산책로
금천과 금천교는 물도 흐르지 않고 다리도 길에 묻힌 형국이라 살펴봐야 보인다.
참느릅나무(?)
서어나무
데크계단로
쉼터①
오른쪽 걷기이다. 가지가 굵은 나무가 많아 자연보호가 잘 된 능이다.
쉼터②
산책로 이정목
안내소
조선왕릉 답사 마지막 왕릉이다. 2016년에 시작하여 거의 10년에 걸친 답사이다. 산이 전공이고 문화유적은 부수적인 활동이다. 40기나 되는 왕릉 중에서 제일 마지막 순서에 든 것도 나와는 인연이다. 산소는 화려한 것보다 처연한 게 더 인상적이다. 온릉 능주의 인생처럼 남편(중종) 잘 만나 구중궁궐도 잠시 결과적으로 남편(중종) 잘못 만난 탓에 평생을 본가에서 생과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이곳에 묻혔다. 온릉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단경왕후의 일생이 그려진 탓일 게다.
2025년 03월 28일